NBA의 영원한 아웃사이더 데니스 로드맨이 은퇴한 이후, 리그에서 가장 행동이 불성실하고 어필을 밥 먹듯이 하는 선수는 누가 있을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라쉬드 왈라스를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그는 2000-2001 NBA 기록인 41개의 테크니컬 파울로 불명예를 않았으며, 이런 모습은 많은 팬들을 실망시켰다. 워낙 그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다 보니, 그의 이름은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왈라스는 ‘코트의 악동’으로서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히기 시작했다.






농구를 배우다!


여느 흑인 가정이 그렇듯 매우 빈곤한 생활 속에서 라쉬드 왈라스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으며 농구선수가 되고 나서도 아직까지 필라델피아에 대한 애정이 대단해 매년 자선 사업을 펼치고 있다. 라쉬드 왈라스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영향을 받고 자라서 그런지 어머니 젝키 왈라스의 말에는 항상 복종했다. 왈라스를 컨트롤 할 수 있었던 사람은 오직 그의 어머니뿐이었으며, 왈라스는 종종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어머니라고 말할 정도로 ‘효자’였다.

시몬 그래츠 고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왈라스는 본격적으로 농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는 평소에 평범한 학생이었으나 농구공을 잡을 때만큼은 승부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 그 집착이 너무 과해 고등학교에서도 말썽을 일으킨 것이 문제였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농구에 대한 열정을 표현하기엔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1988년부터 2002년까지 시몬 그래츠 고교 코치였던 빌 엘럴비(Bill Ellerbe) 역시 왈라스에 대한 ‘기억’은 특별했다고 말한다.

“나는 오랜 코치 생활동안 이런 선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농구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끔 식 그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죠. 한 마디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졌다는 말입니다. 또, 경기 도중에 항의 때문에 퇴장당하는 일이 자주 반복되었으며, 경기준비를 하지 않아서 자주 벤치에 앉히게 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 시절은 나에게 있어서 흥미로웠던 순간이었으며 왈라스도 모두 이해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빌 엘럴비 (前시몬 그라츠 고교 코치)

사실, 왈라스는 빌 엘럴비를 매우 존경했으며 엘러비는 왈라스에게 ‘스승’이나 다름없었다. 단조로웠던 공격 패턴으로 무식하게(?) 득점을 올리던 방식에서 포스트 움직임을 강화해 자유자재로 득점을 올릴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은 바로 엘럴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슛을 던지는 타이밍과 슈팅 성공률까지 향상 시킬 수 있도록 지도해준 사람도 엘럴비였다. 이처럼 공격에 있어서 왈라스는 꾸준히 성장했고, 이와 같은 활약으로 팀에서 가장 믿음직한 스코어러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수비에서 왈라스의 모습은 어땠을까? 엘럴비는 자신의 제자 왈라스의 수비에 대한 능력은 부족했지만, 하고자 하는 의욕은 대단했었다고 기억한다.

“경기 도중에 라쉬드 왈라스는 수비에서 위치 선정을 제대로 잡지 못했습니다. 물론, 어린 선수들에게 이 같은 실수는 항상 일어나는 일이고, 나는 괜찮다고 그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꾸짖으면서 화를 내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자신의 주먹으로 기둥을 세게 쳤습니다. 당연히 그는 퇴장을 당했고 주위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며 그를 정신적으로 이상한 선수가 아닌가 하고 어린애 취급하기 시작했죠. 그러나, 나는 왈라스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그는 수비를 능숙하게 하고 싶어 했으며, 자기 자신이 못해서 화를 낸 것뿐이었죠. 누구한테도 욕설을 하지 않았고, 오직 자신을 나무랐으니 그는 진정으로 팀원들을 생각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라쉬드 왈라스는 조금 성장한 듯한 느낌이었다. 로-포스트에서 그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으며 외곽에서도 그는 정확한 중거리 슈팅으로 수비수들을 어렵게 만들었다. 팀은 승승장구했고 왈라스는 전미 최우수 선수에 선정되기도 했다. 모든 것은 순조롭게 돌아갔고 왈라스는 어느덧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


1962년부터 1997년까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통산 879승이라는 역대 최다승을 기록한, 모든 농구 인들이 존경하는 딘 스미스는 역사상 최고의 대학 감독 중에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기록한 위대한 업적 뿐 아니라 모든 선수들에게 ‘아버지’ 같이 대하는 그의 인자한 성품은 여러 사람에게 칭찬받기에 충분했으며, 그는 두차례의 NCAA 우승, 11번의 파이널 포 진출을 이끈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라쉬드 왈라스를 자신의 모교인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접근했다. 당연히 라쉬드 왈라스는 망설임 없이 노스 캐롤라이나를 선택했고 거기서 그는 여러 훌륭한 동료들을 만나며 새로운 농구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왈라스는 2년 동안의 대학 생활동안 짧지만 강한 임펙트를 남겼다. 특히, 1학년 시절보다는 2학년에 접어들면서 기량을 꽃 피우기 시작하며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그는 AP선정 올 아메리카 세컨드 팀에 뽑히기도 했으며 자신의 재능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NCAA무대에서 그는 가장 강력한 선수 중에 하나였고 독특한(?) 행동으로도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2학년이었을 때, 왈라스는 당시 1학년이었던 빈스 카터가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부진하는 모습을 보이자 곧바로 그에게 다가가서 말을 던졌다. 경기에서만큼은 난폭하기로 소문난 왈라스는 카터에게 협박하듯이 말했다.

“빈스,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나는 손바닥으로 너의 얼굴을 때릴 것이다.” -라쉬드 왈라스 (빈스 카터가 경기에서 부진하자)

그랬다. 라쉬드 왈라스는 경기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패배하는 것을 싫어했으며 동료들의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그들을 자극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라쉬드 왈라스와 아직까지도 친한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제리 스택하우스도 빈스 카터처럼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말한다.

“농구선수들에게 있어서 누구나 슬럼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어느 날, 슈팅이 들어가지 않고 제가 마음먹은 대로 플레이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실책을 여러 개 범하면서 저는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그 순간, 라쉬드 왈라스가 다가왔죠. 그는 저보고 게임 도중에는 절대로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집중하라고 말했습니다. 왈라스의 조언 덕분인지, 저는 그 후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제리 스택하우스

하지만 그는 절대로 모범적인 선수는 아니었다. 경기 매너는 물론,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하는 연습도 빠지기 일쑤였다. 경기 중엔 상대에게 거친 파울을 범하며 퇴장을 당하는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고, 괜한 싸움으로 경기 자체를 엉망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더구나 왈라스는 늦잠을 자는 관계로 비행기에 탑승하지 못해 경기에 빠지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저질은 경험도 있다. 아무리 개인주의 사회가 강한 미국사회에서도 엄연한 규칙이 존재하지만 왈라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를 두고 스승인 딘 스미스는 정말로 독특한 선수라고 표현한다.

“저는 라쉬드 왈라스가 코트위에서 하는 행동만 보더라도 그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가끔 식 덩크를 내리 꽂은 이후 포효했습니다. 림을 잡고 한 동안 공중을 바라보았습니다. 당연히 심판들로부터 테크니컬 파울을 받았죠. 그러나, 그는 그것이 즐거운 모양입니다. 림을 잡고 있는 것 말입니다. 아마 제가 그 상황이었어도 그렇게 행동했겠죠. 어쨌든 그의 행동은 사람들의 시선에 곱게 보이지 않았지만 저는 그가 훌륭한 농구선수라는 것만은 확신합니다.” -딘 스미스 (라쉬드 왈라스의 돌출 행동에 대해)

더 이상 대학무대서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선수가 없다고 판단한 왈라스는 1995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 신청서를 내기로 결심하며 대학 생활을 끝마친다.

프로 생활


1995년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1번으로 지명된 선수는 조 스미스였다. 비록, 지금은 평범한 선수에 불과하지만, 그 당시 스미스는 대학 최고의 슈퍼스타였다. 그 뒤를 이어 안토니오 맥다이스, 제리 스택하우스가 차례로 지명되었고, 라쉬드 왈라스는 전체 4번으로 워싱턴 불리치(현재 위져즈)에 입단하게 된다. 이미 워싱턴에는 크리스 웨버, 주안 하워드와 같은 훌륭한 포워드들이 넘쳐났지만 웨버의 갑작스런 부상으로 왈라스는 충분한 기회를 보장받는다. 신인으로서는 드물게 52게임을 선발로 나와 평균 10.1득점, 4.7리바운드를 기록했으며, 1996년 NBA 올스타 위켄드 동안 열렸던 루키 게임에서도 12득점을 올려 강한 인상을 남겼다. 또한, 왈라스는 가끔 식 센터로 경기에 투입되면서 기대 이상으로 자신의 몫을 다해냈는데, 이때의 경험으로 왈라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성공적으로 루키 시즌을 마친 왈라스였으나 크리스 웨버가 복귀하면서 워싱턴은 자연스럽게 왈라스를 트레이드하기로 결정, 결국 왈라스는 포틀랜드 블레이저스로 새롭게 둥지를 옮기게 된다. 왈라스는 새로운 환경에서도 꾸준히 활약했고, 아이재아 라이더, 케니 앤더슨과의 호흡에도 문제가 없었다. 그는 로-포스트 어디에서든지 득점이 가능했으며, 상대 수비가 집중 마크를 할떈 외곽으로 나와 중거리 슈팅으로 수비수들을 제압했다. 특히, 그의 포스트 업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상황에서는, 막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포스트 업 자세이후 던지는 슈팅은 타이밍도 적절했지만, 동작이 매우 부드러우며 성공률 역시 높았다. 포틀랜드에서의 첫 시즌을 평균 15.1득점, 6.8리바운드를 올렸고 팀은 15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으나 아쉽게도 레이커스에게 패배하며 시즌을 마감한다. 결국, 포틀랜드 수뇌부는 칼리시모 감독을 해고하고, 마이크 던레비를 새로운 사령탑으로 앉혀놓고 시즌을 준비한다.

새로 부임한 마이크 던레비는 라쉬드 왈라스를 중용했다. 하지만, 직장 폐쇄로 시즌이 단축된 1998-1999 시즌, 왈라스는 벤치멤버로서 시즌을 맞이하는데, 이유는 팀 동료인 브라이언 그랜트가 놀라운 성장을 보였고, 뛰어난 수비와 강력한 리바운드 장악력은 던레비를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출전시간이 10분가량 줄어들었어도 왈라스가 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주전급 선수들 못지않았다.  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 그는, 주전 스물 포워드였던 월트 윌리암스가 부진하자 스물 포워드로 경기에 나서기도 했다.

“그는 리그에서 가장 완성된 선수 중 한명입니다. 신체조건은 남들보다 월등하며 운동 능력도 수준급에 속합니다. 그리고 외곽에서도 자유자재로 슈팅을 던질 수 있으며, 포스트 업 게임에도 능합니다. 그리고, 그는 수비에서도 어떤 선수든지 막을 준비를 갖췄고 팀을 이끌 수 있는 카리스마도 지니고 있습니다.” -마이크 던레비 (前포틀랜드 감독)

라쉬드 왈라스는 훌륭한 선수임에는 틀림없었으나 언젠가부터 심판 판정에 지나치게 민감해 여러 번의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경기 매너와 관련된 부분에서 좋지 않은 경험을 갖고 있었던 그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퇴장 당하는 경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뉴욕 닉스와의 경기 중 일어난 사건은 라쉬드 왈라스의 이미지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다. 경기 중, 왈라스는 뉴욕 닉스의 패트릭 유잉과 약간의 신경전이 있었는데, 거기서 그는 심판의 판정에 문제를 삼아 항의했다. 분명히 판정은 옳지 못했다. 하지만, 심판들도 실수는 저지를 수 있기에 약간의 항의만 필요한 법이지만, 왈라스는 결코 그것을 넘어가지 못했다. 테크니컬 파울을 범했음에도 불구, 끈질기게 심판 옆으로 다가가 욕설과 함께 심판과 입씨름을 했다. 참다못한 베테랑 심판, 조 크로포드는 다시 한 번 왈라스에게 테크니컬 파울을 선언해 그를 퇴장시켰다. 화가 치밀어 오른 왈라스는, 크로포드를 향해 수건을 던졌고, 그 사건으로 왈라스는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는다. 당시 뉴욕 닉스 중계를 담당하고 있었던 마이크 브린과 월트 프레지어저는 왈라스의 행동을 보고 크게 꾸짖기도 했다.

이처럼 왈라스의 행동 자체에는 문제가 있었으나 코트 위에서 왈라스는 여전히 팀의 가장 믿음직한 선수였다. 1999-2000 시즌, 브라이언 그랜트가 주춤하자 왈라스는 다시 주전 파워포워드 자리를 차지했고, 평균 16.4득점, 7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해 포틀랜드 공격에 핵심이었다. 개인적으로 그에게 영광스러웠던 시즌이기도 했는데,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고, 플레이오프에서도 LA 레이커스를 상대로 평균 23.3득점이라는 놀라운 숫자를 찍어냈다. 그 후, 왈라스는 꾸준한 활약으로 포틀랜드를 서부 컨퍼런스 최강팀으로 만드는데 공헌했다. 물론, 아쉬웠던 순간들도 많았다. 2000년 서부 컨퍼런스 결승 7차전은 아직까지도 많은 팬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명승부였고, 여기서 포틀랜드는 또 다시 레이커스를 넘는데 실패한다. 이때의 실망감으로 마이크 던레비는 팀을 제대로 이끌지 못해 팀 성적 부진의 책임으로 해고되고 포틀랜드는 모리스 칙스를 새 사령탑에 앉혀 놓는다. 감독 경험도 없는 ‘초보’ 감독 모리스 칙스는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훌륭히 포틀랜드를 이끌었고, 팀은 초반의 부진을 만회했다.

한편, 라쉬드 왈라스와 모리스 칙스 감독과의 관계는 어땠을까. 존 내쉬 단장은 라쉬드 왈라스를 다른 팀으로 보내기 위해 여러 팀들과 접촉했다. 코트 밖 문제로 신뢰를 잃은 라쉬드 왈라스를 트레이드 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칙스 감독은 라쉬드 왈라스를 잡아두길 절실히 원했다.

“저희 팀 최고의 스타를 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는 그와 몇 년 간 함께 하고 싶고 라쉬드 왈라스는 제가 추구하는 팀 컬러에 가장 어울리는 선수입니다. 211cm의 포워드가 3점슛을 던지며, 플레이오프 무대에서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라쉬드 왈라스를 포기해선 절대 안됩니다." -모리스 칙스

칙스는 왈라스를 붙자고 싶어했으나 팀은 잭 랜돌프라는 특급 유망주가 있었고 홈팬들의 요구대로 왈라스를 트레이드하기로 결정한다. 한때 좌석 점유율이 90%이상이었던 포틀랜드는 왈라스의 돌출행동 때문에 관중 동원에 어려움을 겪었다. 참으로 라쉬드 왈라스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팀내 최고 지역스타는 이렇게 씁쓸한 마음을 간직한 채 포틀랜드를 떠나게 된다.


꿈을 이루다!



포틀랜드는 라쉬드 왈라스와 웨슬리 퍼슨을 애틀란로 보낸 대신, 샤립 압둘라힘, 태오 래틀레프, 댄 디카우를 받아 들였다. 하지만, 라쉬드 왈라스는 한 경기 만에 애틀랜타를 떠나게 되는데, 디트로이트 피스톤스가 ‘우승’을 위해 라쉬드 왈라스를 영입하게 된 것. 벤 왈라스 혼자만으로 서부지구의 강팀들과 상대하기는 힘들다고 판단, ‘악동’ 라쉬드 왈라스는 이렇게 해서 디트로이트로 다시 한번 팀을 옮기게 된다.

왈라스 효과 때문인지,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은 우승 가능성은 점점 현실로 다가왔다. 막 나가는 행동으로 통제가 불가능했던 왈라스는 새로운 팀으로 이적한 이후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물론, 디트로이트의 감독 래리 브라운이 노스 캐롤라이나 출신이라는 점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왈라스는 디트로이트에서 총 22경기를 뛰면서 평균13.7득점, 7개의 리바운드 기록했다. 벤 왈라스와 라쉬드 왈라스를 보유한 피스톤스는 거침없이 우승을 향해 나아갔고, 왈라스는 만족했다.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모두 잊은 채 현재 주어진 상황에서 저는 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저와 팀원들의 목표는 오직 우승뿐입니다.” -라쉬드 왈라스

플레이오프 무대에서도 왈라스는 골밑을 장악했고, 인디애나 페이서스와의 동부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그의 진가가 드러났다. 1승1패로 동률이었던 3차전에서 라쉬드 왈라스는 본격적으로 실력 발휘를 했다. 20득점을 기록하며 팀을 승리로 이끈 것. 홈팬들은 왈라스에게 기립박수로 그에게 보답했으며, 이로서 왈라스는 더 이상 ‘외톨이’가 아니었다. 포틀랜드에서의 아픔을 잊고, 그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인디애나를 꺽으면서 기세가 오른 디트로이트는 결승전에서도 ‘Dream Team' LA 레이커스를 상대로 승리했다. 4승1패로 시리즈를 마무리 지은 것. ‘더블 왈라스’ 벤과 라쉬드는 골밑에서 ‘공룡센터’ 샤킬 오닐을 상대로 대등한 경기를 펼쳤으며, 탄탄한 수비와 조직적인 플레이로 팀을 승리로 이끈다.

다음시즌에도 라쉬드 왈라스는 디트로이트에 계속 머물 것이며, 또 한번의 우승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다가오는 시즌에도 그는 어김없이 가장 많은 테크니컬 파울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며 동료들과의 불화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래리 브라운과와의 갈등도 생길 수 있겠다. 하지만, 만약 그가 철이 들어 심판에게 항의하지 않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농구 보는 재미가 있을까. 아마도 재미없을 것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 라쉬드 왈라스는영원히「악동」으로 남아야 농구 볼 맛이 나지 않을까. 지금 농구팬들이 데니스 로드맨을 잊지 못하듯이 라쉬드 왈라스가 은퇴한다면, 농구팬들은 그를 그리워 할 것이다. 라쉬드 왈라스가 코트에 있는 동안 그의 플레이를 하나라도 놓치지 말자. 몇 년 후, 우리가 그를 그리워하기 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