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과 장량 - 날건달 유방과 명군사 장량의 절묘한 조합




천리밖에서 승리를 결정짓다..........

사면초가(四面楚歌):사면에서 들려 오는 초나라 노래란 뜻. 곧 ① 사방 빈틈없이 적에게 포위된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 ② 주위에 반대자 또는 적이 많아 고립되어 있는 처지. ③ 사방으로부터 비난받음의 비유.


    

장량 읽기의 코드, 공심위상(攻心爲上)



『사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느 날, 장량이 산책을 나갔다. 다리 부근에 이르렀는데, 남루한 노인이 일부러 신발을 벗어 다리 아래로 던졌다. 그리고는 장량에게 말했다. “어이, 꼬마! 저걸 좀 주워 와.” 장량은 속으로 화가 치밀었지만 뒤틀린 속내를 숨기며 다리 아래로 내려가 신발을 주워 노인에게 건넸다. 그러자 노인은 “신겨 줘.” 하며 한쪽 발을 내밀었다. 기왕에 내친걸음이라 장량은 노인의 발에 신발을 신겼다. 그러자 노인이 이렇게 말했다. “어이, 꼬마! 내가 좋은 걸 하나 주지. 닷새 후에 이 자리에 나오도록 해.”



호기심을 느낀 장량이 닷새 후 이른 아침에 다리로 나갔다. 하지만 먼저 나와 있던 노인이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어른과 약속한 놈이 되레 늦어!” 노인은 다시 한 번 약속을 하자고 했다. 다시 닷새 후 장량은 잠도 자지 않고 아예 밤부터 다리 위에서 기다렸다. 아침이 되자 노인이 나타나서는 장량에게 책 한 권을 건네주었다. 책의 제목은 『태공병법』이었다. “그 책을 읽으면 자네는 왕의 스승이 될 수 있어.”



사마천은 왜 이런 황당한 신화를 『사기』에 실었을까? 생각해 보면, 이 짧은 신화적 스토리가 주는 메시지는 결코 허술하지 않다. 우선 장량이 몸을 철저하게 낮추었다는 점이다. 이름 모를 노인이 신발을 던져놓고 주워 오라고 하고, 그 신발을 신겨달라고 하고, 늦었다고 약속 날짜를 다시 변경하는 등의 수모에도 장량은 참고, 또 참았다. 은인자중하며 세월이 주는 시험을 견뎌내야만 천하를 경영할 경륜, 감정을 절제하는 얼음 같은 냉정함, 주변과 어울리는 처세술을 얻게 된다는 메시지다.



이 이야기에서 배워야 할 또 다른 것은 일면식도 없는 남루한 노인의 불합리한 지시에 순응했다는 점이다. 난세에는 특히 예상치 못한 변수나 요인에 의해 대세가 좌우될 수도 있다. 이른바 ‘불확실한 전환요인’이다. 돌발 변수의 출현 그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모른 척 외면하거나, 소홀하게 취합하는 데에 있다. 아무런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 불합리한 명령을 받고서도 묵묵히 수용한 것은 예상치 못한 변수가 돌출하더라도 짐짓 모른 체 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장량이 받은 것이 병법서라는 대목이다. 병법서란 여러 사람의 지혜가 모이고, 철저한 검증의 과정을 거쳐 간결하게 요약된 자료이다. 즉, ‘한 개인의 임의적 혹은 창조적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검증된 지혜를 갖고 상황을 대처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장량은 기책(奇策)이나 간계(奸計)가 아니라 상황에 지극히 합리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승리를 일구어냈다. 장량을 읽는 코드는 신산묘책(神算妙策)이 아니라 공심위상(攻心爲上)인 것이다.





건달 유방 vs 장군의 아들 항우



유방은 어떤 인물인가? 건달이다. 돈벌이도 할 줄 모르고, 그렇다고 학문을 하는 것도 아닌 진짜 날건달이었다. 그런데도 패현의 하급 관리였던 소하와 조참은 그런 유방을 따랐다. 술만 먹으면 ‘나는 용의 아들’이라고 외치는 허풍쟁이에다가 빈털터리인 유방을 이처럼 사람들이 형님으로 모시는 것이 곧 유방이 가진 불가사의한 힘이었다.



유방은 서른 살에 관리로 채용되었다. 자리는 정장(亭長)이었다, 정장은 관리들의 숙박시설인 정(停)을 책임지며, 경비 업무도 맡아보는 말단 관리였다. 유방이 40세의 나이에 거병하여 15살 어린 항우와 천하를 놓고 쟁패할 수 있었던 것도 유방이 정장으로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진승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키자, 유방은 소하와 조참의 도움으로 패현의 현령을 죽이고 100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입성하여 패공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는 난세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역발산 기개세의 항우! 항우는 20살 즈음에 키가 8척(약 184cm)이나 될 정도로 당당한 풍채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막내 숙부인 항량의 손에 자랐는데, 항량은 초나라의 장군 항연의 아들이다. 진나라 2세 황제 원년 7월에 항량과 항우는 거병했다. 이때 항우는 24세였다. 그들에게 범증이 찾아와 책사를 자임했다. 범증은 초나라의 강력한 반진 정서를 이용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초나라 왕의 자손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초나라 회왕을 추대하였으며, 이때 유방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타이밍이 모든 것이다



항우와 천하의 패권을 놓고 싸움을 벌인 이후, 계속에서 항우에게 패한 유방은 형양성으로 쫓겨 들어가게 되었다. 장량은 형양성에서 농성하는 것만으로는 어떤 활로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농성전이 성공을 거두려면 원군이 오든지 아니면 적의 후방에 새로운 세력이 등장해 적을 후퇴시켜야 하는데 지금의 대치 전선에는 그런 조건이 없다.’ 이에 장량은 유방으로 하여금 관중으로 가서 다른 전선을 형성함으로써 형양을 항우의 포위에서 구출하는 전략을 고안하였다.



유방은 장량의 건의를 받아들여 먼저 남방전선을 펼치기로 했다. 남방전선이란 유방군이 무관으로 빠져나가 남방의 완성에 들어가 주변의 섭 지역을 장악하는 형태의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현재 북방의 형양성을 포위, 공격하고 있는 항우가 남방으로 주력군을 이동시킬 것이고, 이 때 한신을 움직여 항우의 발목을 잡자는 구상이었다.



유방은 팽월과 더불어 광역작전을 펼치며 항우 영역의 인접지역이나 보급로를 교란했다. 마침내 항우군과 유방군은 오창이 있는 광무산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명분에서는 유방이 유리했으나, 전력에서는 항우가 우세했다. 그렇게 1년간 대치하던 양 군은 장량의 제안으로 유방이 내건 천하양분을 조건으로 화친을 맺었다. 식량난에 시달리던 항우도 한신과 팽월 등 제3세력의 활동이 맘에 걸렸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최후의 승부수! 승부수를 던질 때는 과감하게 던져야 한다. 광무산을 내려온 후 장량은 최후의 승부수를 걸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약속을 깨고 항우군을 추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량은 이번에 결판을 보지 않으면 앞으로 유방이 항우와 대적하기는 힘들다고 했다. 특히 세월을 더 지체하다간 북방의 한신과 팽월이 독립하는 등 군웅이 앞 다투어 일어나고, 그 결과 항우와 유방의 일대일 구도가 깨질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유방군은 항우군을 추격했으나, 보기 좋게 패배했다. 1안의 실패였다. 유방은 고릉성으로 도망쳤다. 거기서 농성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장량은 2안을 실행에 옮겨 광역화된 전선을 하나로 결집시켰다. 그 동안 장량은 한신과 팽월이 독자 세력화하는 것을 방치해왔다. 그들이 따로 마음껏 움직이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곧 항우에 대한 광범위한 포위망을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연합세력을 단일전선으로 모아야 했다. 문제는 한신과 팽월을 이 전선에 합류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이들을 끌어들일 것인가? 장량은 한신과 팽월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방에게 진언했다. “수양 북쪽에서 곡성까지의 땅을 팽월에게 주어 왕으로 삼으십시오. 또 진나라에서 그 동쪽 바다에 이르는 땅을 한신에게 주십시오. 그리하면 이 두 사람을 지금이라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장량의 예상대로 한신과 팽월은 대군을 이끌고 유방군에 합류했다. 그리고 마침내 유방은 항우를 사면초가에 몰아넣고 굴복시켰다. 항우는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오강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역발산 기개세 항우가 단 한 번의 패배로 천하를 잃은 것이다. 항우와 맞붙어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유방은 그마저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단 한 번의 승리로 천하를 얻었다.



장량은 시종일관 민심을 얻고자 했으며, 전투 하나하나에 매몰되지 않고 각 전투를 대륙 전체의 전쟁구도 속에서 관리하고자 했다. 항우가 싸우고 이기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일 때, 장량은 시대의 저류에 흐르고 있는 민심을 얻으려고 했다. 항우가 모든 전투에 개입하고자 바쁘게 움직일 때, 장량은 유방을 중심으로 한신과 팽월 그리고 다양한 세력들을 활용함으로써 전선을 넓고 유연하게 운영했다.











장량은 단순히 정치 지략꾼만은 아니었다

장자방(장량)이 누구인가? 그는 건달 유방을 도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를 제압하고 한(漢)왕조를 연 창업공신이다. 유방은 장량에 대해 “진중에서 계략을 꾸며 승리를 천리 밖에서 결정지었다”고 평가했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용모가 여인 중에서도 미녀 같았던 장량은 전국시대 7웅(雄)의 하나인 한(韓)나라에서 역대로 재상을 지낸 집안의 사람이다. 장량이 유방을 도운 것은 사실 한나라를 멸망시킨 진시황제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장량이 유방을 도운 사례는 수없이 많다. 주목할 것은 장량이 유방을 보좌한 방식이다. 급할 때 장량은 유방이 식사중이라도 거침없이 들어가 진언했고, 식탁에 있던 젓가락을 들고 이것 저것 가리키면서 알기 쉽게 설명했다. 사기(史記)에 남아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장량에게 또 하나 돋보이는 점이 있다. 그는 유방을 둘러싸고 있던 고향 출신 패거리들(소하, 조참, 주발 등) 이른바 ‘패(沛)마피아’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다. 한나라 건국 후 패마피아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공신들이 팽(烹)당할 때 장량만은 살아남을 만큼 누구에게나 호감을 샀다. 들 때와 날 때를 알았기 때문이다. 사기에 장량은 병약했다고 적고 있다. 병약했기에 주위의 시기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독주할 수 없었거나, 아니면 병약함을 핑계로 주위의 질시를 적절하게 비켜나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장량이 단순히 전투에서 이기는 계책만을 알고 있던 모신(謀臣)이 아니라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장량의 진면목, 즉 경세가 혹은 전략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는 이야기가 있다. 유방이 항우를 앞질러 관중에 입성했을 때다. 그때까지 항우에 비하면 세력이 미미하기 짝이 없었던 유방으로선 실로 처음으로 맞는 큰 승리였다. 관중에 먼저 들어가는 쪽에게 관중왕의 칭호를 주겠다는 진나라 회왕의 말을 생각하면 천하를 얻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대목이 유방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왜 그런가? 유방의 군대가 항우를 영수로 하는 군단의 일개 부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월등한 군사력을 보유한 항우가 명분 때문에 순순히 천하를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장량은 이러한 정세를 냉철하게 읽었다. 관중 땅에 먼저 입성하였다는 사실에 취해 전체 국면을 보지 못하면 대세를 그르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약탈을 일절 금하고, 장악하고 있던 관중 땅을 항우에게 내주자고 주장했다. 군세가 항우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관중 땅을 욕심냄으로써 항우를 자극하여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었다. 또 점령군으로서 은혜를 베풀면 인심을 얻게 된다는 정치적 계산도 했다. 뒤이어 입성한 항우군이 약탈을 일삼아 인심을 잃으면서 유방은 비로소 확실하게 황제 재목으로서 평가를 얻기 시작했다.

장량은 전투에서 지더라도 전쟁에서 이기는 큰 그림을 그렸다. 병법에도 공심위상(攻心爲上)이 최고의 전략이라고 했다. 유방은 관중 땅을 포기했지만 민심을 얻었고, 항우는 관중 땅을 얻었지만 민심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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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신선이 될꺼야 하악하악..
"신선이 되기 위해 몸을 깃털처럼 만들려고 하다가 굶어죽었다."
ㅈ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