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는 식신이라고 해.”

안경을 쓴 풍채 좋은 아저씨가 등장해 허공에 매직으로 그림을 그린다. 자화상같아 보이는 그 그림은 어느새 움직이며 앞에 놓인 것들을 모두 먹어치운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야기는 끊이지를 않는다. 그는 말한다. “먹으면서 말하는 것,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먹는 것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그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어딘가에 전래동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 주머니라도 들어있는 것일까. e스포츠가 시작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풀어놓는 그의 이야기 보따리. 옆집 아저씨 같은 인상과 함께 호탕한 웃음소리로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그, 엄재경 해설을 만났다.

#1. 만화

-엄재경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린 것은 게임이 아닌 만화였다. 만화를 시작한 계기가 있었나.

만화를 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주 어렸을 적의 일이다. 데뷔작을 함께했던 만화가 이충호와 나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그 시절 둘이 함께 만화를 그리겠다는 꿈을 키웠다. 물론 그 후로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입을 치르면서 슬슬 잊혀졌다. 그런데 군대를 제대하고 나왔더니 충호가 진짜로 만화가가 돼 있더라. 그 친구가 내게 스토리 작가로 함께 일하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해 왔다.

사실 처음에는 거절했는데 당시 집안 형편이 그렇게 넉넉하지 못해서 복학할 학비가 부족했다. 공사장에서 막노동도 해 봤지만 아무래도 나는 육체파가 못 돼서 그런지 너무 힘들더라(웃음). 그래서 아르바이트 하는 셈 치고 당시 충호가 연재중이던 ‘마이러브’라는 작품에 합류했는데 그 작품이 큰 인기를 얻었다. 그 때가 우리나라 잡지만화가 막 꽃피던 시기였다. 때를 잘 탔다.

-여러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면 어떤 작품인가.

아무래도 ‘까꿍’이 아닐까 한다. 판매 부수나 인기 면으로 본다면 ‘마이러브’가 앞서겠지만 ‘까꿍’은 참으로 준비를 많이 했던 작품이어서 애착이 크다. 대중적인 만화로 어필하고자 친근한 느낌이 드는 ‘까꿍’이라는 말을 제목으로 골랐지만 실상은 중고생들을 타깃으로 한 만화다. 만화가 이진영씨와 함께 작업했던 ‘어린왕자’나 ‘쥬피터 블루스’등의 단편들은 대중적으로 크게 어필하지는 못했지만 장태산 선생 등 만화계의 어르신들에게 과분한 칭찬을 들은 작품이어서 의미가 깊다.

-남성 작가로는 이례적이게도 순정만화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순정만화를 했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다. 모 순정 월간지에 지금의 아내와 함께 작업한 단편을 발표한 적이 있다. 당시는 연애중이었기 때문에 작업용(?)으로 도전했던 것이다. 그 작품이 순정만화로서 퀄리티가 높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결혼에 골인했으니 제 역할은 다 한 셈이다.

-만화가로 다시 복귀할 의향은 없나.

만화를 다시 하겠다는 생각은 계속 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꽤나 현실주의자다. 지금 당장은 내가 만화를 하는 것 보다 게임 해설을 하는 쪽이 수입이 높기 때문에 게임 해설에 매진할 생각이다. 사실은 올해 초 다시 만화를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너무 오래 쉬었기 때문인지 감각도 많이 떨어져서 작업이 너무 힘들더라. 그래도 언젠가는 꼭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 아마 아내와 함께 작업하게 될 듯 하다.

#2. 뒷담화

-최근 ‘해설가 엄재경’을 이야기 하는 데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스타 뒷담화>다. 큰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출연을 결심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처음에는 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권유가 계속 들어오기도 하고, 무엇보다 라는 정보 프로그램에 짤막하게 들어가는 10분 남짓한 코너길래 편안한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코너가 인기를 얻으면서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독립하게 됐다.

아무래도 민감한 사안을 다루는 프로그램인 만큼 안티들도 늘어났고 비난도 많이 받고 있지만 내게는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정말 오랫동안 리그 중계를 담당하면서 내 이미지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정체돼 있었다. <스타 뒷담화>는 ‘해설가 엄재경’의 굳어있던 이미지를 깨고 새로운 캐릭터를 부여한 프로그램이다.

-민감한 이야기들을 대부분 먼저 끄집어내는 편이다. 부여된 역할인가.

애초에 역할을 정해두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리그를 중계할 때도 서로가 담당하는 포지션이 있기 때문에 그 스타일이 자연스럽게 뒷담화에서도 이어졌다. 방송사 측에서는 어느 정도 의도한 것 같다. 실제로 그런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방송사 관계자로부터 들은 적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공식적으로 주어진 역할은 아니고 나는 그저 평소 스타일대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촬영할 때도 나는 딱히 방송이라는 것을 의식하지는 않는다. 원래 컨셉트 역시 그런 프로그램이고. 내키는 대로 이야기하다 보면 험한 말도 나오는데 그런 것은 알아서 편집 해 주더라(웃음).

-방송사가 관련된 주제에 있어 지나치게 방송사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나는 방송사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고, <스타 뒷담화>라는 것은 어쨌든 방송사에서 제작하는 프로그램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무조건 방송사를 옹호하는 것 만은 아니다. 방송사를 옹호하는 것만큼 비판할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실제 방송에는 내가 이야기했던 것 보다 훨씬 적은 분량으로 편집돼 나가더라. 그 점이 억울하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원래 그런 거니까. 그저 편집된 부분까지 모두 방송된다면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식신’이라는 애칭도 생겼다.

나는 주성치의 팬이라서 영화 ‘식신’을 아주 재미있게 봤다. 그래서인지 대단히 마음에 드는 별명이다. 사실 뒷담화를 맡기 전까지 다이어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생활 습관상 운동은 하기가 힘들어서 주로 저녁을 먹지 않는 것으로 5킬로그램을 감량했다. 그런데 뒷담화를 촬영하게 되면서 다시 3킬로그램이 늘어났다.

‘엄옹’이라는 별명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사용할 만 한 별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나이인데 나보다 연장자인 사람도 시청할 수 있는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엄옹’ 운운하는 것은 실례가 되지 않겠나.



#3. 스타리그

-e스포츠의 태동기부터 지금까지 스타리그를 맡아왔다. 큰 변화라면 어떤 것이 있나.

‘게임큐’라는 인터넷 게임방송 사이트에서 임요환과 유병준의 경기를 보면서 <스타 크래프트>에도 심리전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초창기의 단순한 빌드 싸움에서 치열한 심리전의 시대로 발전했고 지금은 그 심리전이 더욱 교묘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달까.

선수들의 실력은 날이 갈수록 상향 평준화 된다. 이제 갓 데뷔한 선수가 오랫동안 활동해 온 경력있는 선수들을 꺾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금의 스타리그는 ‘누가 누가 잘 하나’가 아니라 ‘누가 누가 잘 속이나’의 전쟁이다.

경기 외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마니아 문화’를 탈피해 진짜 ‘스포츠’로의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다. 초창기의 스타리그는 그야말로 <스타크래프트>를 좀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보는 마니아 방송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메인 팬층이 바뀌었다. 경기 데이터를 줄줄 외우는 마니아들만의 리그가 아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의 경기 승패만이 관심의 전부인 팬들이 더 많아졌다.

특히 여성들과 초중고생들이 팬층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 다른 프로 스포츠 역시 이렇게 대중화 된 것이다.

-선수들의 ‘스토리 텔링’에 주력하는 해설은 지금도 많지 않다. 독특한 무기인 셈인데 특별히 신경을 쓰는 부분인가.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일이다. 이번 <다음 스타리그> 4강전의 변형태와 송병구의 대결만 해도 꼬박 하루를 투자해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경기 결과를 여러가지 예측해 그에 맞는 이야기를 구상한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내가 예상했던 구도와 맞아 떨어지는 확률이 높다.

그럴 때는 마치 내가 쓴 시나리오대로 리그가 흘러가는 듯 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가장 잘 맞아 떨어졌던 것이 바로 임요환이다. 그렇게 내 구상대로 잘 진행이 되면 중계를 하는 나도 더욱 신이 나고 보는 사람들도 재미있다. 나는 내가 재미있으면 보는 이들도 재미있다는 생각으로 중계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재미에 충실한 해설을 하려고 많이 노력하는 편이다. 프로 스포츠는 재미있어야 한다. 재미없는 스포츠를 누가 보겠나.

-선수 출신 해설들에 비해 경기의 맥을 짚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의견들도 있다.

처음에는 그런 의견들에 대해 억울함을 느낀 적도 많았다. 선수 출신의 해설과 그렇지 않은 해설가 사이의 커리어 차이가 만드는 선입견도 크게 작용하는 측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그 측면을 극복해보고자 했는데 포지션이 잡히고 나서 생각을 바꾸게 됐다.

극복할 수도 없거니와 극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같이 들었다. 물론 내가 경기 중에 실수를 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내 해설을 주의 깊게 듣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나는 경기의 중요도가 높아질수록 실수의 빈도가 줄어드는 편이다. 챌린지나 24강보다는 16강에서, 16강 보다는 8강이나 4강에서 보다 경기에 입각한 해설을 한다.

그 이유는 경기 자체의 긴장감이 아무래도 좀 덜 한 경우에는 정확한 경기의 풀이보다 경기를 보는 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해설에 주력하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떠올려내느라 경기의 흐름을 놓치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러나 대부분 3인 중계 체제이기 때문에 다른 한 쪽이 경기를 정확히 읽어내 준다면 나는 흥미요소를 짚어내는 역할을 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선수들의 별명을 만들어내는 데 일가견이 있다.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는 선수가 있나. 반대로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경우라면.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무래도 강 민이다. 몽상가라는 별명은 강 민의 플레이스타일과 아주 잘 어우러져서 그 선수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별명으로 굳혀졌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도 대단히 흡족했고.

뜻대로 안 됐던 경우라면 역시 마재윤이다. 나는 마에스트로라는 별명이 마재윤의 강력함을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별명들을 생각해 봤는데 팬들은 역시 좀 멋진 별명을 좋아해서 그런지 납득시키기가 어렵더라. 최연성의 경우도 비슷하다.

나는 최연성이 영화 ‘헐크’의 이미지와 어울린다고 느꼈다. 헐크는 괴물이기도 하지만 변신 전에는 박사의 모습이다. 영리한 플레이를 하면서 폭발하면 괴물 같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최연성에게 적격인 별명이었다. 별명이라는 건 단어 하나로 그 사람의 특징을 느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멋지기만 하면 너무 재미없지 않나.

-얼마 전 <스타 브레인>에 출연해 김태형 해설에게 승리를 거두기도 했는데.

운이 좋았던 것이다. (박)명수가 잘 한 것도 크고. 실수도 많이 했다. 이미 건설중인 건물을 지으라고 이야기한다든지. 그런데 내 체면을 생각해서 그랬는지 방송에서는 편집이 됐더라(웃음). 김태형 해설과 1대1로 맞붙으면 웬만하면 내가 못 이긴다. 그렇기 때문에 태형이가 조금 방심한 것도 있고.

내가 그렇게 공격적으로 나올 것이라고 생각을 못 했던 것 같다. 나는 기본적으로 대단히 공격적인 성향이다. 팀플레이를 하면 무조건 9드론을 할 정도니까.

-‘엄재경 브레인’을 가장 잘 구현할 것 같은 플레이어를 꼽는다면.

주저할 것 없이 박성준을 꼽겠다. 나의 개인적인 취향에 가장 부합하는 선수다. 공격적이고 또 공격적이다. 내가 게이머를 했다면 박성준 같은 플레이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박성준과 나의 차이점은 냉정함에 있다. 나는 공격을 하다가 경기가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제 풀에 게임을 망치는 경우가 있다. 승부에는 어울리지 않는 타입이다.



#4. e스포츠

-얼마 전 블리자드사가 <스타크래프트2> 출시를 발표했다. 현재의 e스포츠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상하는지.

현재의 <스타크래프트> 리그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타크래프트>는 이제 확실하게 자리잡은 종목이다. 일부에서는 e스포츠라는 타이틀을 걸고 지나치게 한 종목에 편중돼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하지만 실상 종목의 편중화는 팬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게임 방송사는 기업이고 이윤을 추구한다.

게임 방송사가 <스타크래프트> 중심으로 방송을 편성하는 것은 타 종목을 육성해 방송하는 것 보다 <스타크래프트> 중심의 편성이 더 ‘장사’가 되기 때문 아니겠는가. 결국 종목의 흥망성쇠는 팬들이 결정하는 것이다. <스타크래프트2> 역시 팬들을 사로잡는 것이 중요하다.

-<워크래프트3>는 한국에서 자리잡는 데 실패했다.

<워크래프트3>는 e스포츠 종사자로서 아쉬운 부분이 많은 게임이다. 실패 이유는 간단하다. 일반 시청자들이 보기에 재미가 없었던 것이다. 여러가지 문제가 중첩된 결과지만 이유는 한 가지다. <스타크래프트>만큼 만족스러운 재미를 주지 못했기 때문에 리그를 지탱해 줄 팬들을 확보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워크래프트3>라는 게임에 익숙해지지 못한 상황에서 지나치게 전문성을 추구했다고 해야할까.

<워크래프트3>를 무조건 재미있게 느낄 수 있는 방송을 만들었어야 했다. <스타크래프트>가 오랜 시간을 거쳐 쌓아온 것을 단번에 가져가려 했던 것이 화가 됐다고 본다. 마니아들의 영향을 지나치게 많이 받았다. 보다 대중화를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크다.

-앞으로의 e스포츠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시장도 넓어지고 갈수록 체계화되고 있다.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대한체육회에 정식 체육종목으로 등록되는 것. 그리고 프로리그에 한해 지역 연고제를 실시하는 것이다. e스포츠에 지역 연고제가 뿌리내리게 된다면 흔히들 말하는 ‘거품’이 걷히고 나서도 일순간에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더 나아가서 학교에 클럽이 생기는 등 e스포츠의 밑바탕을 이루는 힘이 될 것이다.

박송이 기자 raki@fighterforum.com

프로필

1968년 2월24일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
1993 마이러브
1995 까꿍
1996 쥬피터 블루스
1996 초시공전사 넥스트
1998 스피릿 등
현 온게임넷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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