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경영학] 용인의 천재 조조

배딸룡 2006.08.28 23:18 조회 수 : 212

국가건 기업이건 사람이 가장 중요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걸 제대로 알기도 어렵거니와 실천하기는 더 어렵다. 옛날 어느 대통령은 “인사는 만사(萬事)”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를 해놓고 막상 인사를 할 때는 엉망으로 하여 실패한 정권을 만들고 종국에는 나라를 벼랑에 몰고 간 사례가 있다.




기업의 흥망도 대개 인사에 좌우된다. IMF 사태 후 대기업들의 명암이 엇갈렸는데 가장 큰 원인은 인재를 잘 키우고 활용한 쪽과 그렇지 못한 쪽과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조조의 위나라가 삼국 중에 가장 강성한 원인도 조조의 성공한 인사에서 찾을 수 있다. 조조뿐 아니라 촉나라의 유비나 오나라의 손권도 인사를 잘 했지만 종합적으로 볼 때 조조가 한 발 앞섰다. 의리나 인정에만 호소하지 않고 일할 보람과 안정된 자리, 또 물질적 보상을 해 주는 현대적 관리기법을 일찍부터 썼던 것이다.




조조는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사람을 잘 쓸 줄 알았다. 사람의 능력과 잠재력을 정확하게 파악해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또 사람에 대한 욕심도 많았다. 좋은 인재를 보면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좋아했다. 더러는 실패한 경우가 있어도 평생 인재 사랑은 변치 않았다. 조조 밑엔 인재가 항상 들끓었다. 정확한 평가를 하고 사람을 길러주고 거기다 사람을 끄는 매력 같은 것도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신상필벌이 엄한 대신 인재라고 생각한 사람에겐 매우 관대한 면도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끌림 같은 것이 있는데 조조에겐 그런 게 있었다. 조조 밑엔 그야말로 다양한 사람들이 풍부하게 포진해 있었다. 좋은 계책을 내는 참모, 용맹스런 장수, 병참이나 행정에 능한 관료, 글을 잘 쓰는 문장가들이 즐비했다. 이들을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하듯 자유자재로 써서 나라와 천하를 경영한 것이다.




조조 진영도 처음엔 친척들이 중심이 되었다. 다행히도 친척 중엔 출중한 무장이 많았다. 조인(曺仁), 조홍(曹洪), 하후돈(夏候惇), 하후연(夏候淵) 등은 당시 일류 가는 무장들이었다. 이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시작은 했지만 곧 가족회사의 한계를 느낀다. 그때부터 조조는 대담한 외부수혈을 하는데 싸움에 이겨 다른 나라를 점령할 때마다 적군 가운데 좋은 인재를 발탁해 쓴다. 적군뿐 아니다. 황건적이나 산적 중에서도 재주가 출중하면 과거를 묻지 않고 중용했다. 조조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세상의 평판이 중요해졌는데 그땐 이름 있는 명망가를 간판으로 데려다 놓는다.




조조는 숨은 인재를 발굴해 낼 줄 알았다. 재주가 넘쳐 일찍 빛을 발하는 사람은 그들대로, 대기만성형의 둔중한 사람은 그들대로 조조는 잘 골라 썼다. 사마의(司馬懿)같은 사람은 큰 그릇이기는 하나 눈에 잘 띄지 않는 타입인데 조조는 빨리 알아보고 데려다 쓴다. 처음엔 사마의가 많이 고사했으나 조조의 거듭된 요청에 수하로 들어간다. 만약 조조 밑에 안 갔다간 목숨이 위험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그 당시엔 출중한 인재를 자기편에 못 끌어오면 차라리 없애 버리기도 했다. 적의 편에 가담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사마의를 자기편에 끌어왔기 때문에 위나라는 촉나라 제갈공명의 거듭된 공세를 막을 수가 있었다. 제갈공명도 천재적 군사(軍師)였지만 사마의도 그에 못지않은 전략가였다. 날카로운 공명의 공세를 사마의가 둥글게 잘 막아냈다. 사마의가 없었더라면 제갈공명이 북벌의 꿈을 이루었을지 모른다. 위나라에 행운이고 촉한(蜀漢)엔 통한이다. 공명 때문에 사마의가 그늘에 가려지지만 높은 지략과 안목, 행동력에 있어서 두 사람은 막상막하(莫上莫下)였다. 이런 사마의를 일찍 알아보고 자기 진영에 붙잡아 둔 조조의 안목은 정말 놀랍다 할 것이다.




조조 밑에 사람이 모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적극적, 진취적으로 사람을 찾아 나섰다. 조조가 56세가 되었을 때 인재를 모으려고 발령한 구현령(求賢令)을 보면 조조의 인재관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 내용을 보면 “예부터 왕조를 부흥시키거나 치세(治世)를 잘한 황제는 모두 훌륭한 인재의 도움을 받았다. 현인을 발견하려면 윗사람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현인은 우연히 만나는 게 아니다. 청렴하고 결백한 선비가 아니면 안 된다느니 하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간 언제 현인을 찾을 것인가. 지금 큰 재주를 지녔지만 한가하게 낚시나 하고 있는 강태공(姜太公)이나 형수와 관계를 가졌느니 뇌물을 받았느니 하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한고조(漢高祖)의 일등공신이 된 진평(陳平)같은 인재가 어딘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초야에 있는 사람을 찾아내라. 오직 능력만으로 천거하라. 나는 능력 있는 사람을 중용할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난세엔 도덕성보다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조조의 인재관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런 인재관은 아직까지 중국에서 이어지고 있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실용주의적 인재관이 바로 그것이다. 명분 위주의 인재관 때문에 나라나 기업이나 유능한 인재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유교적 영향이 강한 한국에선 그 폐해가 지나칠 정도다. 조조는 그런 실용적 인재관을 일관되게 실천한다.




조조의 측근 참모 중에 곽가(郭嘉)라는 사람이 있었다. 재주가 뛰어나 조조가 늘 중요사를 의논하고 총애했다. 안목이 높고 머리회전이 빨라 고비 때마다 기발한 타개책을 내놓곤 했다. 그 대신 품행은 별 방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지식한 어느 대신이 곽가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자주 올렸다. 그때마다 그 대신에겐 엄정한 사람이라 하여 상을 내렸으나 곽가는 계속 곁에 두고 중용했다. 재주는 재주, 품행은 품행이라는 생각이었다. 감격한 곽가가 조조를 위해 더욱 충성을 바친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조조는 심지어 유비까지 자기 밑에 두고 싶어 애를 많이 썼다. 유비가 어려울 때 많이 거두어 주었다. 당시는 군웅들이 아직 할거할 때였는데 다른 사람은 다 우습게보아도 유비는 한목 놓아 주었다. 천하에 영웅은 조조 자신과 유비뿐이라고 대놓고 말한다. 측근 참모들이 유비가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니 차라리 죽여 후환을 없애자고 건의한다. 그때 조조는 “지금은 인심을 얻어 천하의 인재를 모을 때인데 유비를 죽이면 누가 나에게 오겠느냐”며 말린다. 아무리 애를 써도 유비가 도망을 가자 조조는 호의가 증오로 변해 치열한 보복에 나선다.




조조가 중용하여 큰 업적을 이룬 사람 중엔 다른 주인 밑에 있다가 온 사람이 많다. 그쪽에선 빛을 못 보다가 조조한테 와서 위대한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조조 밑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순욱(荀彧)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유비 밑의 제갈공명에 비유될 정도로 많은 일을 했다. 조조가 기초를 세울 때 참여하여 크고 작은 계책을 내고 또 성공시켰다. 만약 순욱이 발안한 몇 가지 결정적인 헌책이 없었더라면 조조의 패업은 중도에 좌절됐을지도 모른다. 순욱은 당초 조조의 라이벌인 원소(袁紹)에게 갔다가 실망하고 조조 진영으로 옮긴 사람이다. 순욱이 조조 밑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마지막엔 조조와 뜻하는 바가 달라 자의반 타의반으로 자살하고 만다. 조조는 용도가 있을 땐 사람을 지극히 아끼지만 용도가 끝나면 차갑게 대한다. 이점은 인정 많은 촉나라 유비와 좀 다르다.




난세엔 주인은 신하를 잘 만나야 하지만 신하도 주인을 잘 만나야 한다. 그때 줄을 잘 못 서면 패가망신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천하의 인재들은 좋은 주인을 찾아 다녔다. 주인의 그릇은 어느 정도인가, 머리는 괜찮은가, 덕은 있는가, 인심은 후한가 등을 따져 이합집산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세상의 평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금도 줄서기에 따라 운명이 갈린다. IMF 외환위기 이후 큰 기업들의 부침이 갈리면서 어떤 경영자는 감옥에 들어가고 재산 차압까지 당한 반면 어떤 경영자는 스톡옵션 등으로 큰 재산을 모으고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 때는 재산 정도가 아니라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이었다. 그래서 주인의 사람됨이 매우 중요했다. 순욱이 원소를 버리고 조조를 찾아 왔을 때 조조는 그야말로 버선발로 뛰어 내려와 “나의 장자방(張子房)이 왔도다”하고 반긴다. 장자방은 뛰어난 지혜로서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창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량(張良), 바로 그 사람이다. 조조는 순욱의 무한한 가치를 잘 알았던 것이다.




사실 조조의 최대 고비는 원소(袁紹)와 중원을 놓고 다툰 관도(官渡)의 싸움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최대의 강자끼리 싸운 준결승전 같은 것이었다. 그때 원소의 참모였던 허유(許攸)가 조조에게 투항해 오는 것이 승패의 갈림길이 된다. 허유가 아무리 좋은 계책을 내놔도 원소가 듣지 않자 기밀문서를 가지고 조조를 찾아간다. 두 사람은 어릴 때 친구 사이였다. 허유는 원소의 군량미가 있는 곳을 알려주고 그 곳을 급습하라고 일러준다. 당시는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하는 중이라 거짓 정보도 많았다. 그래서 허유의 정보가 적군의 모략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었다. 조조는 그런 것을 가려내는데 천부적인 감이 있었다. 틀림없는 정보라 판단해 스스로 기습작전에 나선다. 어름어름하면 절호의 찬스를 놓치고 만다. 건곤일척의 기습작전으로 원소의 군량미를 불태우고 승기를 잡는다. 만약 그 기습작전이 실패했으면 조조는 그대로 싸움에 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승부수를 띄우는데 있어서 조조는 천재적이었다. 결국 그 때문에 조조는 최후의 승자가 된다.




애초엔 원소가 병력이나 병참, 인재 면에서 앞서 있었다. 그러나 CEO라 할 수 있는 조조와 원소의 능력을 비교할 때 조조가 월등했다. 원소는 유능한 참모들이 많았지만 그들을 쓸 줄 몰랐다. 대를 이은 명문귀족으로서 자만심만 높아 인재를 대접하거나 소중히 생각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환관의 후손으로 늘 몸을 낮추는 자세였다. 많은 인재들이 절망하고 떠났기 때문에 원소는 관도(官渡)의 싸움에서 패하고 자멸하고 만다. 리더의 무능과 자만심 때문에 도저히 질 수 없는 싸움에서 지는 것이다. 그런 일은 요즘에도 일어난다.




원소를 이기고 나서 조조의 큰 그릇이 그대로 드러난다. 조조가 원소의 본영에 도달했을 때 급하게 쫓겨 가느라고 중요문서들이 그대로 널려 있었다. 그 중엔 원소에게 온 비밀편지 뭉치도 있었다. 부하들이 그걸 조조에게 바치자 두말 않고 불 속에 던져 버린다. “비밀편지를 태우면 누가 원소에게 접근했는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하고 참모들이 말렸더니 조조는 편지가 다 타도록 꺼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이제 원소가 망했으니 천하의 사람이 모두 내 사람인데 옛일을 따져 무슨 소용이 있느냐. 원소가 강성할 땐 나도 속으로 두려웠거늘 보통사람이야 오죽 했겠느냐” 하고 손을 털었다 한다. 아마 조마조마한 사람 많았을 것인데 이 광경을 보고 조조에게 다시 한 번 감복했을 것이다.






위대한 경영자는 시대의 흐름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고 결단할 수 있어야 한다. 시대의 흐름은 비범한 통찰력을 갖춰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타고난 자질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감지하든 참모의 의견을 듣든 뛰어난 동물적 감각이 있어야 한다. 공부를 하고 훈련을 쌓으면 어느 정도는 가능할지 모르나 한계가 있다. 그것은 경영자의 또 하나의 그릇이라 할 수 있다.




시대의 흐름은 처음엔 구체적인 모양으로 나타나진 않는다. 간헐적인 징후로 보일 뿐이다. 그 징후가 거듭되면 하나의 조류를 이루고 그것은 불원간 현상으로 나타난다. 하루하루를 보면 비슷한 날이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고 가는 것과 같다. 세상의 민심이라든지 시대의 변화는 예민한 사람만이 감지할 수 있다. 오동잎이 떨어지면 가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천시(天時)란 말이 바로 바로 시대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알아도 행동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머리 좋은 경영자에게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분명히 앞을 내다보았는데 이것저것 생각하다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이다. 그런 경우가 너무 많다. 결과적으로 처음부터 생각 못하는 것과 꼭 같다.




조조의 위대함은 비상한 통찰력과 때를 놓치지 않는 행동력이다. 그래서 천시(天時)를 가장 잘 탔고 처음부터 유리한 고지를 점해 마지막까지 압도적 우위를 유지했다. 조조, 손권, 유비 가운데 항상 조조가 앞섰다. 오늘날의 기업 경영에 비유하면 창업도 가장 빨랐고, 시장 점유율도 가장 높았으며, 수익률이나 재무구조도 가장 좋았다. 사소한 싸움에선 손권이나 유비가 더러 이길 때도 있었지만 대세를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언젠가는 조조의 위(魏)에 평정될 운명이었다. 세 나라 가운데 위가 압도적으로 강해 오(吳)와 촉(蜀)이 연합해야만 겨우 대항할 수 있었다. 그 연합이 잘 될 땐 그나마 버틸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하면 둘 다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조조의 전략은 늘 두 나라를 분열시켜 공략한다는 것이었다.




조조는 일찍부터 그 출중한 자질을 드러냈다. 말 잘 듣는 체제 순응적인 모범생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임기응변과 지략이 풍부했다. 명문 귀족도 아니고 학자 집안도 아니었으나 돈은 많았다. 그런 집안 배경 때문에 그토록 발상이 자유롭고 행동이 거침없었는지 모른다. 격변기의 경영자로선 딱 맞는 자질이다. 조조는 부잣집 아들답게 방탕한 생활도 했으나 큰 뜻은 항상 버리지 않았다. 부친의 돈으로 부지런히 놀고 사람도 많이 사귀었고 인심도 후했다. 그러나 남몰래 공부도 많이 하고 특히 병법(兵法)을 부지런히 익혔다. 현실에 안주해 재산이나 모으면서 적당히 살기보다 무언가 꿈을 찾고 도전한 것이다.




청년시절 수도 장안(長安)에서 경찰서장직을 맡게 된다. 집안의 재력이 큰 힘이 됐을 것이다. 취임하자마자 성문에 5색 몽둥이를 죽 세워 놓고 누구든 궁성 문을 출입하는 법을 위반하면 이 몽둥이로 때려죽이겠다고 선언을 한다. 이때 재수없게도 당시 세도가의 숙부가 걸려든다. 평소 조카의 세도를 믿고 거들먹거리던 자였다. 조조가 법대로 하려 하자 부하들도 말리고 사방에서 압력이 들어온다. 그러나 조조는 굴하지 않고 법대로 때려죽인다. 그 때문에 조조의 명성은 널리 나지만 세도가에게 찍혀 지방으로 좌천하게 된다. 적당히 타협하면서 자리나 유지하고 출세하는 것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젊었을 적엔 당시 권력자였던 대장군 하진(何進)의 참모 노릇을 했다. 하진은 당시 세도를 부리던 환관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의 장군들을 불러올릴 의견을 내놓는다. 환관들도 군대를 갖고 있어 지방의 군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같은 참모였던 원소를 비롯한 다른 사람은 찬성했지만 조조는 반대한다. “환관이란 예부터 있어온 존재로서 황제가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발호하는 것이다. 실제 아무런 힘이 없고 주동자 몇 사람만 처벌하면 간단히 제압된다. 똑똑한 사법관리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괜히 이들을 견제한다고 지방의 군대를 끌어들이면 이리를 쫓으려다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꼴이 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조조의 의견은 채택되지 않았고 그때 불러들인 동탁(董卓)이 낙양(洛陽)을 점령하여 나라를 한동안 쥐고 흔든 것은 그 뒤의 일이다. 조조는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해결책을 찾아내는 비상한 능력을 가졌던 것이다. 이런 능력은 갈수록 날카로워져 평생 변하지 않는다.




정권을 장악한 동탁은 조조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측근으로 쓰려 한다. 소위 출셋길이 훤히 열린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동탁의 한계를 재빨리 보았다. 동탁은 한실을 없애고 자신이 천하를 차지할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천하대세나 동탁의 그릇으로 보아 오래 못 간다는 확신이 섰다. 조조는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한다. 이때 이미 조조는 창업자 오너가 될 길에 들어선 것이다.




조조가 고향으로 도망가는 길에 여백사(呂伯奢)라는 아버지 친구의 집에 들른다. 그 집에선 환대를 하지만 중간에 무슨 오해가 생겨 여백사의 식구들을 모두 죽이게 된다. 이때 조조는 자기가 하는 일에 장애가 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해 치우는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내가 천하를 배반해도 천하가 나를 배반하게 할 수는 없다.” 이때 조조가 한 말이다. 조조는 고향에 돌아가자 전 재산을 털어 군사를 모았고 지방의 제후들에게 동탁 타도를 호소한다. 중국 천하의 영웅호걸들이 동탁 타도를 위해 모인다. 원소(袁紹), 원술(袁術), 손견(孫堅), 공손찬(公孫瓚), 한복(韓馥), 포신(鮑信) 등이다. 후에 촉나라를 세운 유비는 공손찬의 용병대장으로 겨우 참가했다. 연합군의 대의명분은 근사해도 속셈은 각기 달랐다.




이때만 해도 조조는 여러 군웅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고 세력도 미미했다. 그러나 포부나 지략은 뛰어났다. 연합군은 총대장으로 원소를 추대한다. 집안도 좋은데다 세력도 가장 강했다. 원소 집안은 4대에 걸쳐 정승을 낸 명문 중의 명문이었고 원소의 인망도 높았다. 그러나 지략이나 그릇에 있어선 조조에 못 미쳤다. 토벌군이 몰려오자 동탁은 천자와 함께 낙양을 버리고 장안으로 도망간다. 조조는 동탁을 추격하자고 하지만 다른 제후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 조조는 혼자서 군사를 이끌고 동탁을 추격하지만 반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는다. 항상 적극적인 조조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그 뒤 연합군은 흐지부지되고 각기 영지로 돌아간다.




조조는 천하의 대의를 세우려면 실력을 더 키워야 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리고 천하의 주인이 될 뜻을 정하고 세력 확대에 매진하게 된다. 이때부터 뛰어난 인재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집안에도 우수한 인재가 많았지만 천하를 경영하기 위해선 더 유능한 인재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기업의 규모가 커질 때 그에 상응하는 인재를 갖추지 못하면 조직이 기형이 된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이 될 때, 야당이 갑자기 집권을 할 때 생기는 현상이다. 그런 점에서 조조는 타고난 감각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세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토를 넓히고 백성을 모아야 한다. 이때 조조는 비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 요즘말로 하면 전략적 사고로 시스템적 접근을 한 것이다. 당시는 황건적의 난을 비롯한 연이은 전란으로 백성들이 땅을 잃고 마음 붙이고 살 데가 없었고 중국 천지에 유랑민이 들끓었다. 이들에게 안심하고 살 터전을 만들어 주자, 백성들을 전란에서 구하고 천하를 태평케 하자, 그러면 나의 패업은 저절로 탄탄해 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백성들을 지켜주고 먹여줘야 한다. 그걸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보통 싸움을 통해 성과 영토를 뺏을 생각만 할 때에 조조는 한 수 더 본 것이다.




이때 시행된 것이 둔전제(屯田制)와 호병제(戶兵制)다. 당시만 해도 식량부족이 심각했다. 큰 기근이 한번 들면 수백만이 굶어 죽고 백성들은 유랑민이 되거나 도적으로 변했다. 그래서 조조는 전란으로 버려진 논밭을 모두 나라에서 거둬들이고 백성들을 모아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을 씨앗이나 농기구, 심지어 소까지도 빌려주고 추수 땐 산출량의 6할을 받았다. 적지 않은 부담이었지만 열심히 일하면 먹고 살 수는 있었다. 그래서 많은 유랑민들이 조조의 영내로 몰려들었고 조조 영지의 식량은 증산되고 자연히 경제력은 날로 튼튼해졌다. 그 대신 세금을 매우 가볍게 해 주었다.




호병제는 병사를 일반백성과 구별하여 일정지역에서만 근무하면서 농사짓게 하고 아버지가 사망하면 아들이 그 뒤를 잇게 한다. 도망가면 가족 전체가 처벌을 받는다. 이 때문에 조조는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상비군을 유지하게 되고 비상동원 체제도 갖추게 되었다. 조조가 전쟁에서 패해도 군사를 계속 보충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시스템에 힘입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스템은 선순환구조를 이뤄 인구증가, 경제력증강, 국방강화로 연결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게 아닌 것 같지만 그 당시 전란 틈에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놀라운 일이다. 위대한 경영자는 남이 생각 못한 것을 앞서서 생각하고 실천한다.




이와 비슷한 때에 조조는 또 하나의 획기적 사업을 한다. 바로 한나라 천자를 자신의 근거지로 모신 것이다. 당시 한나라 황제는 동탁에 얹혀 있다가 동탁이 죽고 천하가 전란에 휩싸이는 바람에 유랑생활을 하는 처지였다. 지위만 높았을 뿐 힘이 없어 매우 궁핍한 처지였다. 동탁에 의해 장안까지 끌려갔다 낙양으로 돌아 왔으나 누구 하나 받드는 사람이 없었다. 조정이란 것도 이름뿐이었다. 이때 천자를 모셔와 천하에 명분을 세우자고 어느 참모가 건의한다. 무슨 말인지 조조가 빨리 알아들었다. 조조가 천자를 모시겠다고 하자 궁핍했던 천자와 조정은 대환영하며 조조에게 대장군이란 큰 벼슬을 내린다. 이때 원소에게 태위(太慰) 벼슬을 내리는데 조조보다 낮다고 받지 않자 조조는 두말 않고 대장군을 양보한다. 명분보다 실질을 항상 중시한다.




조조는 천자를 모시고 근거지인 쉬창(許昌)으로 돌아간다. 그 다음부턴 조정과 천자의 이름으로 모든 명령이 나간다. 조조가 즉 조정이 되어 다른 제후들을 호령하게 된 것이다. 또 천자의 권위를 매우 편리하게 쓴다. 비록 천자가 실권은 없었지만 그 이름이 갖는 상징적인 가치를 재빨리 간파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조는 매우 선각자이고 동물적인 계산능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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