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판타지 ?

젝스 2006.10.03 21:51 조회 수 : 250

1일차: 영주의 성에 기사들 몇몇이 바쁘게 드나들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보다.

2일차: 어느 기사가 16세부터 40세의 남자는 모두 마을 한 가운데에 모이라고 했다. 올해 열 여섯인 나 톰은 친구인 찰스와 함께 친하게 지내는 옆집 형 존을 따라 마을 한 가운데로 갔다. 그 기사는 종이를 펼치더니 '국왕 폐하의 이름으로!'라고 크게 외치며 혼자서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아마 전쟁이 일어났으니 우리를 징집하겠다는 말인 것 같았다. 찰스는 '저 종이만 보고 국왕 폐하의 말씀을 어떻게 안다는 거지?'하고 의문에 휩싸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존이 말하길, 저 종이는 국왕 폐하가 말씀하신 것을 머금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와 찰스는 깜짝 놀라 '마법이군'하고 동시에 소리쳤다. 어쨌든 울먹거리는 부모님을 뒤로 하고 길을 떠났다.

3일차: 아침에 딱딱한 빵 하나 주더니 계속 걸으란다. 할 수 없이 계속 걸었다.

4일차: 들에서 잤더니 추워서 뒈지겠다. 옷이라도 하나 더 가져올 걸. 또 걸었다.

5일차: 발뒤꿈치가 까졌다. 욕이 나왔지만, 말을 타고 있는 기사가 무서워 참았다.

7일차: 드디어 다른 지방의 징집병과 합류했다. 그들도 하루에 빵 하나만 먹고 왔다고 했다. 그래도 죽창이나마 들어서 병사처럼 보였다. 우리는 아마 거지처럼 보였겠지. 쪽팔렸다. 존이 나와 찰스에게 감춰뒀던 빵을 내밀었다. 존은 이번이 두 번째 전쟁이라서 아는 게 좀 있었다. 앞서지도 말고, 뒤서지도 말고 중간만 가자고 했다.

10일차: 씻지를 못해서 온몸에서 쉰내가 났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도시에 들어와서 충분히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마 기사가 먼저 가서 우리가 도착할 테니, 음식을 해놓으라고 명령을 내린 모양이었다. 뒤에 있다가 존을 따라 행렬의 중간으로 왔는데, 과연 탁월한 선택이었다. 앞엣놈들은 설익은 것을 먹었고, 뒤엣놈들은 그나마 음식이 떨어져서 못 먹었기 때문이었다. 존 옆에서 떨어지지 말아야지.

12일차: 창을 하나씩 지급해줬다. 녹이 슨 데다가 자루는 썩어서 부러지기 직전이었다. 기사가 알아서 수리해놓으라고 했다. 젠장! 맨손으로 어쩌라고? 그래도 기사가 채찍질을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나 보다. 할 수 없이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서 수리해놓았다.

13일차: 훈련을 시켰다. 식량사정이 다소 좋아졌지만, 빵 몇 개 먹고 무슨 훈련을 하랴?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기사가 뒤쳐지는 몇 놈을 사정없이 때렸기 때문이었다. 기사는 북을 치면 앞으로 전진하고, 나팔을 불면 후퇴하라고 했다. 그리고 모이면 창을 쓰고, 흩어지면 칼을 쓰라고 했다. 찰스가 '칼이 없는데요'라고 했다가 욕 많이 얻어먹었다. '알아서 구해!' 그게 기사의 대답이었다. 어쨌든 하루종일 창으로 찌르는 연습을 했다. 중간중간에 북을 치고 나팔을 불었는데 똑바로 못해서 열라 굴렀다. 무식한 놈들... 존을 따라하면 되는데...

14일차: 갑옷을 지급해줬는데, 구린내에 질식해 죽는 줄 알았다. 백년 전에 빨아놓은 옷인가? 하여간 제대로 된 게 없다. 존이 별로 필요없다고 해서 외투만 입고 나머지는 찰스 줘버렸다. 찰스는 죽기 싫다면서 여러 겹 껴입었다.

15일차: 드디어 출동했다. 말하자면, 걸었다.

16일차: 걸었다.

17일차: 걸었다. 결국 찰스는 지쳐서 갑옷 하나 빼고 다 버렸다. 글쎄, 존의 말을 들으라니까.

20일차: 강을 만났다. 배가 별로 없어서 여길 건너려면 며칠이 걸릴 듯싶다.

23일차: 강을 건넜다. 성질 급한 기사 하나가 그냥 헤엄쳐 건너자고 했다가 몇 명 빠져죽고 나니까 조용해졌다. 그 기사는 귀족에게 열라 맞았다. ㅋㅋ 속이 시원했다.

24일차: 밤이 되어서야 성에 도착했다. 까진 발뒤꿈치는 이제 포기상태다.

25일차: 실컷 씻었더니 무너진 성을 쌓으란다. 하여간에 기사들은 우리가 쉬는 꼴을 못 본다.

30일차: 드디어 성 다 쌓았다. 그런데 씨X , 너무 높아서 대포를 올릴 수 없단다. 다시 돌을 날랐다. 기사가 그렇지, 뭐. 머릿속까지 근육만 있는 새X들...

31일차: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색깔별로 깃발을 들고 와서 뭐라고 소리쳐댔는데, 너무 멀어서 안 들렸다. 존이 '난 배워서 아니까 나만 따라와'라고 해서 안심했다. 찰스는 자신이 똑바로 들었다며 헛짓거리하다가 채찍을 맞았다. 결국 울면서 '존 형... 나도 형 따라할래'하고 징징댔다.

35일차: 돌대가리만 모아놔도 훈련을 계속하니까 그나마 좀 낫다.

40일차: 따뜻한 스프 먹고 싶다. 옷 갈아입고 싶다. 푹신한 짚 위에서 자고 싶다. 씻고 싶다... 살려줘!

41일차: 소문이 퍼졌다. 우리 군대가 적국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우리도 출동했다. 결론적으로 걸었다... 달리 뭘 기대했냐?

42일차: 걸었다. 씨X , 기사들은 말 타고 갔다.

50일차: 성으로 다시 돌아왔다. 식량을 나르란다. 씨X , 귀족들도 머릿속에 근육만 들지 않았는지 의심스럽다.

55일차: 공성병기 나르란다. 존이 갑자기 큰 공성병기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그쪽이 더 편하단다. 과연, 달구지가 와서 해체한 공성병기를 실었다. 우리는 맨몸으로 걸었다. 얼씨구나 작은 공성병기에 매달렸던 ㅎㅛㅇ아들은 나무를 짊어지고 헥헥거리고 있었다. ㅋㅋ 군대는 줄을 잘 서야 돼...

60일차: 적국의 마을에 도착했다.

61일차: 존이 우리에게 총각 딱지를 떼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오줌 누는 것처럼 행렬에서 몰래 빠져나가 어느 집에 들어갔다. 어떤 소녀가 몸을 팔고 있었는데 적국의 백성이라서 ㅎㅛㅇ아들의 손찌검이 장난이 아니었다. '너 때문에 우리가 두 달이나 고향을 떠나있어!' 그러면서 막 했다. 찰스는 고향에 두고 온 누나 생각이 난다고 안 했다. 난 했다. 존이 '어른이 된 기분이 어때?'라고 물었다. 존, 미안...사실 예전에 앨리스 꼬셔서 해봤어. 앨리스는 존의 여동생이다. 그거 걸리면 적에게 죽기 전에 존에게 죽을 텐데... 비밀로 해야겠다.

62일차: 행렬 앞부분이 막혀서 하루종일 앉아있었다. 적군이 기습했다고 한다.

63일차: 드디어 성에 도착했다. 공성병기를 조립해서 한쪽에 세워두고 밤새 보초 섰다.

64일차: 기사가 적군을 하나 죽일 때마다 은화 하나 준다고 약속했다. 찰스가 좋다고 나서려는 것을 존이 말렸다. '기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그냥 나중에 약탈할 때 슬쩍 끼는 게 나아.' 존의 생각은 확실히 우리보다 위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중간에 남기로 했다.

65일차: 성을 공격했다. 앞엣놈들은 적군에게 화살을 맞았고, 뒤엣놈들은 앞으로 안 나간다고 우리쪽 기사들에게 채찍을 맞았다. 역시 군대는 줄을 잘 서야 돼... 우리는 중간에 끼어 납작하게 될 뻔했다가 나팔 소리를 듣고 후퇴했다. 성을 빼앗지 못했다고 빵 하나가 저녁식사의 전부였다. 배고파 뒈지겠다... 엄마, 아빠 보고 싶어.

66일차: 찰스가 화살을 맞았다. 어깨를 스쳤는데 저녁 때까지 피가 잘 멎지 않았다. 존이 화살에 냄새를 맡아보더니 똥오줌 냄새가 난다고 했다. 나는 '미친 색휘! 화살에 똥오줌을 왜 발라?' 했는데 존은 심각했다. 그거 맞으면 파상풍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67일차: 예상대로 파상풍이었다. 날이 더워져서 전염병 때문에 걱정인데, 파상풍이라니. 기사에게 가서 말했는데 다른 기사에게 가보라고 했다. 그런 식으로 몇 바퀴 돌기만 하다가 왔다. 채찍도 맞았고, 욕도 먹었다. 지들만 치료하면 다냐? 다행히 어떤 창녀가 빵 하나 주면 붕대 준다기에 그러기로 했다. 그런데... 그 창녀가 준 것은 걸레보다 못한 속옷이었다. 찌른내에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그래도 별 수 있나? 대충 빨아서 찰스의 어깨에 감싸주었다.

68일차: 찰스 때문에 걱정이다. 한쪽 팔을 거의 못 쓴다. 땡볕에서 덜덜 떨며 웅크리고 잔다.

69일차: 존이 찰스는 어렵겠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 무슨 소리냐고 물었지만, 예상했던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하루종일 찰스 곁에 있었다. 덕분에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지만, 찰스의 마지막 모습은 지킬 수 있었다. 고향에 가서 찰스의 부모에게 뭐라고 해야할지 걱정이었다. 찰스의 호주머니에는 손수건과 작은 칼이 있었다. 나는 존과 하나씩 나눠가지고 고향에 돌아가기로 했다.

70일차: 뭔가 심상치 않다. 배급하는 식량이 줄어든다.

71일차: 기사들도 매우 초조해한다. 무슨 일이지?

72일차: 소문으로는 우리가 포위당했다고 했다. 맙소사!

73일차: 탈영병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사들이 귀신 같이 알고 쫓아가서 죽였다. 몇몇의 목은 본보기 삼아 내걸렸다.

74일차: 다시 성을 공격하기로 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밀려 존과 떨어졌는데, 창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되돌아와야 했다. 저녁 늦게까지 존이 보이지 않았다. 걱정스럽다. 설마 죽은 것은 아니겠지?

75일차: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엄마, 사랑해요. 아빠, 죄송해요.

76일차: 오늘도 성을 공격하는데 양쪽 산에서 소리가 났다. 적군이었다. 우리는 줄행랑을 쳤지만, 기사들을 뿌리칠 수 없었다. 적군은 말을 타고 우리를 철저히 짓밟았다. 무서웠다. 무서웠다. 무서웠다.

77일차: 기사가 별로 안 보인다. 우리만 남겨놓고 도망간 것일까?

78일차: 적군의 검에 맞았다. 허벅지에서 피가 마구 솟구쳤다. 어떻게 도망쳤는지 기억이 안 난다.

79일차: 오늘이 마지막인 듯싶다. 우리는 얼마 남지 않았다. 포위당했고, 기사는 없고, 먹을 것도 떨어졌다. 무기를 손에 든 사람은 항복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적군은 항복을 받아주지 않겠다고 했다. 화가 나서 우리끼리 싸움이 벌어졌다. 나는 한쪽에 누워 이 일기를 쓴다. 허벅지는 썩어가고 있다. 자유로운 것은 이 두 손뿐... 적군의 함성이 들린다. 만약 내가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면...

80일차: 적군이 왔다. 그들은 악마다. 화살로 우리의 반을 죽인 뒤, 철저히 갑옷으로 무장한 채 기어 올라왔다. 그들이 우리를 하나하나 확인사살을 하고 있다. 자, 다음은 내 차례다. 고향이 그립다. 부모님께 제대로 인사하지 못하고 와서 슬프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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