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光海君)의 평가

섹건 2008.01.11 21:26 조회 수 : 177

광해군(光海君)의 평가

①광해군 폐위와 경제정책의 실패 - 전용덕 / 대구대 무역학과 교수

이야기식 역사서가 속속 출간되어 역사의 대중화를 진작시킴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한 책들 중에 본지 2000년 11월호와 12월호에 차례로 서평된 한명기(이하 존칭 생략)의 《광해군》과 이덕일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는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의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됨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두 책 모두 통념을 깨고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최근 동북아 일대의 정세가 크게 변하고 있고 조선왕조의 이념체계에 대한 비판과 대안 모색이 활발한 때에―왜냐하면 아직도 우리는 조선왕조의 이념체계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고 있기 때문에―저자들은 당시의 역사로부터 많은 교훈을 도출하고 있다. 한명기는 광해군을 명청 교체기에 탁월한 외교정책을 구사하여 나라를 전쟁의 위기에서 구한 군주로 평가하고 있다. 이덕일은 그의 책의 앞부분에서 광해군을 재위 15년 동안 수많은 업적을 남긴 현군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한 작지 않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그들의 광해군에 대한 평가가 과연 문제가 없는지를 재삼 생각해보게 되었다. 필자는 광해군의 외교 정책의 탁월함에 대한 두 사람의 평가에는 아무런 의문이 없다. 광해군은 확실히 당시의 어느 신료보다도 명청 교체기의 변화를 가장 잘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섣부른 명분에 빠져 전쟁을 자초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점은 인조대에 두 번의 호란을 맞았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더욱 뚜렷해진다. 그리고 광해군은 변화의 시기에 정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수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 그렇게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明과 後金을 둘러싼 정세의 변화를 읽기 위하여 노심초사했다는 점, 임진왜란 직후 백성들의 對日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외교관계를 정상화한 점 등은 당대 최고의 외교 전문가로서 결코 손색이 없다고 하겠다. 문제는 광해군이 직·간접으로 시행한 경제정책의 영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광해군의 경제정책을 평가하기 전에 당시의 전반적인 사회·경제상을 간략하게나마 먼저 알아보자.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1597년 정유재란이 있었으며, 1598년에 이순신 장군이 노량진 해전에서 전사했다. 광해군은 전쟁이 실질적으로 종료한 해로부터 10여 년 후인 1608년 2월에 왕위에 올랐다. 두 번의 전쟁이 끝나고 겨우 1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광해군 즉위 당시는 백성들이 여전히 왜란의 후유증을 겪고 있을 때라고 하겠다. 한 연구에 의하면 세금징수가능 토지taxable land의 면적이 임란 직전 해인 1591년에 약 170만 결에서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고도 3년이 지난 1611년(1598년을 기준으로 하면 13년이 지났음)에 약 54만 결로 크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농업이 당시의 주된 생업이었음을 감안하면 이 자료로 전쟁의 후유증이 얼마나 컸는가를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구의 감소, 특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연령층의 감소는 또 어떠했겠는가. 심지어 당시 일본이 조선 백성을 잡아 유럽에 노예로 팔아먹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외에도 각종 도구나 시설물의 파괴는 임란 후의 전체 생산성을 크게 떨어뜨렸을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란을 거치면서 양반을 정점으로 하는 계급질서도 붕괴의 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나 사회질서도 매우 불안정했다.

전장을 직접 누빈 군주로서 전쟁의 참화를 누구보다 생생히 알고 있었기에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비록 경기도 지역에 한해서이지만 大同法을 실시했다. 기득권 층의 엄청난 반발이 있었지만 광해군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공물을 현물로 걷는 대신 봄과 가을로 쌀 열여섯 말만을 내도록 하고 여타의 비용은 완전히 없애도록 한 대동법은 많은 비리를 일거에 제거했다. 그리고 1613년에 광해군은 宣祖代부터 추진해온 동의보감을 간행했다. 전란 뒤에 발생하는 각종 전염병을 치료하여 국민의 건강을 돌보기 위한 것이었다. 광해군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국조보감》 등을 다시 편찬했을 뿐만 아니라 적상산 史庫를 설치했다. 전란으로 그 일부가 불탄 창덕궁과 종묘를 중건하여 임금의 거처를 마련하고 전쟁으로 추락한 왕조의 권위를 고양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더하여 광해군이 나라를 다스린 초기에는 왕위 책봉 등을 이유로 중국의 사신이 많은 양의 銀을 탈취해간 것도 사실이다. 1608년에 엄일괴와 만애민이 은 수만 냥, 1609년 유용이 약 6만 냥, 1610년에 염등이 수만 냥을 탈취해 갔다. 또한 1608년과 1609년에는 흉년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1609년 광해군은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함으로써 對일본 무역을 정상화하였다. 이제 광해군 초기의 경제를 전반적으로 평가해보자. 대동법의 실시, 동의보감의 간행, 대일 무역의 정상화 등은 경제의 생산성을 높여 당시 백성의 삶에 크게 기여했다. 다른 한편, 엄청난 양의 은의 유출, 새로운 사고의 설치, 창덕궁과 종묘의 수리 등은 대부분이 백성에게 별다른 혜택 없이 세금만을 부과하는 것으로 경제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에 추가하여 두 해나 흉년이 듦으로써 세금은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도 자료는 없지만 높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요약하면, 광해군 초기에는 대동법 등의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음을 고려하더라도 백성은 세금 부담의 증가와 인플레이션의 이중고를 겪었음이 틀림없다. 이러한 상황은 광해군 후기에 오면 더욱 악화되는데, 바로 이 점이 문제이다. 1617년(광해군 9년)에 광해군은 경덕궁과 인경궁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짓기 시작한다. 1619년과 1620년에 전라도와 충청도에 대기근이 들고 ‘심하전투’에 명나라를 지원하기 위하여 1만 명의 군사를 파병했다. 파병과 함께 상당량의 말을 명에 제공하고, 군량미, 군복을 위한 布, 방한복 등을 병사들이 지참해야 했다. 1만 명의 인력과 지원 군비는 당시의 피폐한 현실에서 매우 무리한 것이었다. 전투 참전 병력의 거의 대부분이 후금의 포로가 되어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인력 손실 또한 큰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광해군은 많은 양의 은을 명의 관리들에게 수탈당하거나 뇌물로 바쳤다. 1621년에 명나라 사절 유홍훈과 양도인에게 약 8만 냥의 은을 빼앗겼다. 1622년에 명의 감군어사 양치원에게 수만 냥을 빼앗기고, 1621년 이후에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접대비용을 지출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상당량의 군량미를 지출하였다. 당시의 은의 가치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광해군이 명나라 사절이나 관리에게 빼앗긴 은의 총 가치를 알 수는 없다. 다만 한명기는 그의 책에서 은 수만 냥이 조선 왕조 1년 재정의 1/3과 거의 맞먹는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1621년부터 1622년(인조반정이 나기 일년 전)까지 명나라에 빼앗긴 은과 모문룡을 위하여 사용한 비용과 지출한 군량미의 총 크기는 엄청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은은 임진왜란 이후로 비록 일부 지역과 계층이지만 화폐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상품화폐인 은의 유출이 통화량 감소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명으로의 은의 대량 유출은 인위적인 경기침체를 초래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만 자료의 부족으로 그 정도를 알 수 없고, 이 점은 향후 학계에서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비록 이 당시에 왕조 정부가 화폐를 발행하지 않았지만 백성들은 상당량의 통화감소의 부정적 효과를 감수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광해군이 명나라 사절이나 관리에게 빼앗긴 은은 이유야 어떻든 당시의 재정 상태를 고려한다면 너무 많은 양이라고 하겠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왕조의 재정은 거의 파탄 지경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세금은 날로 증가했을 것이다. 만약 광해군이 재정적 측면에서 백성의 부담을 심각하게 고려했다면 과연 그러한 지출을 허용했을까. 그러나 이러한 의문을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위에 열거한 지출 중에는 순전히 광해군의 의지에 따라 지출을 안 할 수도 있는 것이 있었다. 궁궐을 짓는 것이 그것이다. 과연 궁궐을 짓는 일은 당시의 백성에게 경제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까. 엄밀히 말하면 광해군은 경덕궁과 인경궁을 제외하고도 창덕궁 중건(1607(선조 40년)∼1608), 창경궁 중건(1615∼1616, 시작 연도는 부정확), 경운궁 보수, 그리고 자수궁을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자수궁은 ‘광해군 일기’에 창건이 언급은 되고 있지만 더 이상의 기록은 없다.

이러한 사실은 경덕궁과 인경궁 창건에 사용되었던 비용만이 광해군代 궁궐營建 비용의 전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창덕궁과 창경궁은 초기에 중건되었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경덕궁과 인경궁의 규모, 그것을 짓는 데 들어간 비용과 재원 조달 과정을 간략히 보기로 한다. 경덕궁과 인경궁 공사는 1617년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지만 전자는 1620년 11월에 마무리되었고, 후자는 인조반정 때까지도 공사가 계속되다가 인조반정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경덕궁은 창덕궁과 비슷한 크기이거나 그 이상이고, 인경궁은 임란 전의 경복궁(7백여 칸)의 10배 정도의 크기였다고 한다. 즉, 경덕궁은 1천5백여 칸이고, 인경궁은 4천5백∼5천5백여 칸 정도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두 궁궐의 합은 6천∼7천여 칸이 된다. 광해군은 이 정도의 大役事를 동시에 진행한 것이다. 궁궐을 짓는 데 들어간 비용을 보여주는 기록은 매우 단편적이다. 공사비용 마련은 토지의 結 수에 따라 포목을 거두는 방식을 취했고, 인력은 僧軍 등을 동원하였으며, 채색용 도료 등을 명으로부터 수입했다고 한다. 공사비용에 대한 연구가 있기는 하나 매우 부정확하고 단편적일 뿐만 아니라 인력동원이 강제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당시의 자료를 이용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더욱 문제는 민가를 사들이면서 지출한 비용 등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전체 공사비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궁궐영건을 위한 재원은 초기에는 농민만을 대상으로 토지에 부가하는 방법으로 시행되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한시적 목적의 부가세를 징수한 것이다.

그러나 비용 마련이 점점 어렵게 되자 조세 형평성 차원에서 문무관리로부터도 포목을 징수하였다. 또한 백성에게 대가를 받고 벼슬을 팔거나 천한 신분을 면제해주는 방법으로도 비용을 마련했다. 이것이 신분제 붕괴의 시초라고 여겨지고, 당시 양반 계급의 반대를 받았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調度使와 篤運別將을 지방에 파견하여 궁궐영건을 위한 자재의 수급과 재정의 확보를 독려하였다. 조도사와 독운별장의 횡포는 지방 사대부의 士族으로서의 긍지와 자존심을 훼손했다. 경덕궁과 인경궁 공사를 시작한 다음 해인 1618년에 명으로부터 파병 요구가 있자 공사에 대한 강한 반대가 일었고 이후 계속 신료들의 반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공사비용 마련이 모든 사람에게 큰 부담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광해군은 조선왕조에서 가장 많은 궁궐을 짓고 수리했다. 궁궐을 짓고 보수하는 일은 엄청난 역사이다. 그 일을 제대로 계량해보는 일은 앞에서 보았듯이 자료의 부족으로 쉽지 않다. 조선왕조 말엽에 흥선대원군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역사는 비교를 위한 좋은 준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중건한 경복궁의 규모가 7천8백여 칸으로 경덕궁과 인경궁을 합한 규모보다 약간 크기 때문이다. 만약 광해군 초기에 중건했던 창덕궁(선조 때 공사 시작)까지 합친다면 광해군이 지은 세 궁궐의 규모는 7천7백∼8천7백여 칸으로 경복궁보다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광해군은 창경궁을 중건했고, 경운궁을 보수했으며, 종묘를 중건했다. 1865년 대원군은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경복궁 중건을 시작한다.

대원군은 경복궁 重建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當百錢 1천6백만 냥을 발행한다. 물론 이 돈은 군사력 강화를 위한 비용과 잦은 흉년으로 인한 구휼을 위한 비용 등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발행되었다. 즉, 그 금액이 모두 경복궁 중건을 위하여 사용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돈이 당시 화폐 총 잔고보다 조금 상회하는 엄청난 금액이라는 것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당백전 발행 전의 총 화폐 잔고는 약 1천3백∼1천5백5십만 냥이었다는 것이다. 물가의 상승으로 당백전 1천6백만 냥도 부족하여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을 위하여 원납전 등의 방법으로 더 많은 강제 기부, 즉 실질적으로는 조세를 부과하였다. 이러한 수치는 경복궁 중건에 얼마나 많은 자원이 소요되었는가를 어림짐작할 수 있는 자료다. 급격한 통화량 증가로 인한 살인적인 물가상승(2년간 약 600퍼센트 상승)과 과중한 세금으로 대원군은 지지기반을 상실했고, 이어 하야해야 했다. 비록 일부의 주장처럼 경복궁 중건이 대원군 하야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닐 수도 있지만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주된 원인이고 그것이 대원군에 대한 儒林의 탄핵과 반대를 불러온 遠因임에 틀림없다. 조선왕조의 법궁인 경복궁은 1592년 소실되고, 신료들의 반대로 270여 년 동안 중건되지 못했다. 조선왕조 후대의 신료들은 무엇보다도 궁궐중건을 위한 재원 마련의 어려움 때문에 경복궁 중건을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반대한 것이다. 대원군은 왕조와 왕실의 권위와 안위를 위하여 그러한 금기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

광해군이 짓다가 중단한 궁궐인 인경궁과 경덕궁을 합한 규모가 1865년에 중건된 경복궁보다 약간 작았다. 조세 부담은 절대적인 조세액도 중요하지만 국민총생산의 규모에 따라 상대적인 정도가 더 중요하다고 하겠다. 광해군이나 고종 시대나 국민총생산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전체 경제의 발달 정도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17세기에 移秧法의 발달로 이후 농업의 생산성이 크게 증가했다. 17세기 말에는 농업의 상업화가 상업의 발달을 촉진시켜 5일 장시가 전국에 1천여 개가 넘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업의 발달은 드디어 1678년 상평통보의 발행을 가져오게 만든다. 그 이전까지 포목이 화폐로 사용되었으나 그 실용성이 제한적이었다. 즉, 포목은 내구성에 문제가 있어서 화폐로서 사용함에 비용이 많이 들었다는 것이다. 숙종이 당쟁의 와중에도 상평통보를 발행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상업이 발달했다는 의미도 되고 그 이후에 상업의 발달을 촉진시켰다는 의미도 된다. 17세기 이후에는 수리시설 등을 만들어 그 이전까지 순전히 자연적인 지배를 받던 농업을 어느 정도나마 관리할 수 있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거시적으로 볼 때 17세기 초에 비한다면 19세기 중엽이 경제가 더 발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일시적으로 기근이 드는 경우는 예외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궁궐영건이 조세부담률을 끌어올린 정도는 광해군 시대가 더 컸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제 궁궐영건이 광해군의 폐위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기로 한다.

광해군의 궁궐영건은 경제 여건이 악화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지 않는 무리한 공사로 당시의 백성에게 경제적으로 엄청난 부담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그 부담이 너무 커서 당시의 다수였던 백성의 지지를 완전히 잃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이 과정에서 사대부들의 지지도 잃었던 것도 확실하다. 절대군주라 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모두의 지지를 잃고는 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정치학의 전통적인 지혜이다. 즉, 경제정책의 실패는 폐위의 실질적인 이유가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필자와 한명기와 이덕일의 광해군 해석에 대한 차이다. 물론 한명기는 그의 책에서 궁궐영건은 광해군의 過라는 점을 지적하고는 있다. 그러나 필자 생각에는 궁궐영건이 過 정도의 것이 아니라 왕을 廢하는 정도의 영향력을 지닌, 크게 실패한 경제정책이라는 것이다. 이덕일은 한명기와 달리 경제적인 점은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덕일은 광해군을 賢君 또는 愛民을 실현한 군주 등으로 평가하고 있다. 광해군이 전란의 현장에서 접했던 참혹한 현실은 광해군으로 하여금 백성의 삶의 고단함을 이해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그것이 대동법의 시행, 동의보감의 간행 등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은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광해군의 애민 정신은 후기에 들어 현장에서 멀어지면서 점점 무디어지고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라도와 충청도에 大饑饉이 들고, 심하전투에 병력과 군비를 투입해야 했으며, 많은 양의 은을 명에 빼앗기거나 뇌물로 바쳐 재정적으로 거의 파탄이 난 상태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그러한 큰 공사를 강행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한 경제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권력을 쥐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廢母殺弟, 排明論 등과 같이 광해군을 폐할 정치적 명분도 만만찮게 많았다. 즉, 정치적으로 위기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경제적으로도 폐해가 누적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덕일은 그의 다른 책에서 당시의 백성들이 광해군의 치세에 만족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그 증거로 반정 일등공신 ‘이서’의 반정에 대한 회의적인 회고를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회고가 광해군 치세에 대한 백성들의 만족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증거로는 부족하다고 하겠다. 무엇보다 반정 세력이 내세운 반정의 정치적 이유는 백성의 피부에 와 닿는 것이 아니었다는 측면에서 반정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농민을 포함하여 피지배 계급의 생산에 寄生했던 조선왕조의 양반 계층은 당시 농민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시 말하면, 지배 계층인 양반이 경제 현상에 관한 한 현실적인 안목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서의 회고는 인조반정 당시 백성들이 광해군의 치세에 만족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는 불충분하다고 하겠다.

오히려 각종 비용에 대하여 필자가 제시한 직접적인 자료를 해석하는 일이 더 정확할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와 두 역사학자의 광해군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는 광해군 시대를 평가하면서 나오게 되는 교훈에서 차이가 나게 된다. 궁궐영건은 오늘날 국민 대다수가 필요로 하는 교량이나 공항 건설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후자는 만약 그것이 정말로 국민 다수의 필요에 의한 것이라면(현실은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경제의 생산성을 끌어올리지만, 전자는 정치 안정으로부터 오는 긍정적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다고 하겠다. 즉, 궁궐영건은 비용만 들 뿐 혜택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도한 조세는 국민 경제를 파탄으로 이르게 하는 지름길이다. 설상가상으로 은의 대량 수탈에 의해 초래된 통화량 축소가 몰고 온 경기침체, 대기근, 군비의 확충, 심하전투 파견과 군비 마련, 모문룡에 대한 접대와 군비 지출 등으로 후기의 경제 환경이 극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만약 광해군이 현명한 군주였다면 그리고 진실로 애민하는 군주였다면 그렇게 많은 재원이 드는 궁궐영건을 그것도 둘씩이나 한꺼번에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필자는 악화된 경제환경을 무시하고 매우 무리하게 시작된 궁궐영건이 경제 파탄을 초래했고 그러한 경제 파탄은 광해군 폐위의 결정적 빌미를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광해군의 폐위는 “예로부터 전쟁과 토목공사를 병행한 나라 치고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는 광해군 당시의 신료들의 경고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바로 그 점에서 궁궐영건을 광해군 폐위의 이유로 제시한 인조반정 세력의 주장은 옳다고 하겠다.

현대 경제학 용어로 표현하면 광해군은 경제정책의 대실패를 초래한 것이다. 광해군 시대의 이러한 교훈은 현재도 매우 의미가 있다. 경제위기를 맞아 국민 소득은 크게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유야 어디에 있든 세금은 증가하고 있고 각종 보험과 공공요금 등은 국민 소득의 증가폭보다 더 빠르게 증가하여 국민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국민의 형편을 무시한 과세는 그 목적이 무엇이든 득보다 실이 더 많다. 또한 엄청난 공적 자금 투입으로 인한 재정적자는 향후 경제에 큰 부담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공적 자금이라는 말장난에 속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무리한 적자재정에 덧붙여 인위적인 저금리 정책은 경제주체의 자연스러운 소비, 투자, 저축 등의 패턴을 왜곡시켜 경제가 정상적인 행로에서 벗어나게끔 하고 있다. 이러한 폐해는 언젠가 국민 모두가 감당해야 할 것이다. 昨今의 계속되는 위기는 정부 정책의 실패에 근본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경제적인 측면만 본다면 광해군 시대와 지금이 다른 점이 무엇인가. 광해군 시대의 역사는 광해군을 폐위시킨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그 정확성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 점에서 그들의 기록에 의존하여 역사를 해석하는 일은 매우 조심을 要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당시의 사대부들이 명분을 중시 여겼다는 측면에서 경제 행위에 대한 사실 왜곡은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광해군의 후기, 특히 후기의 경제정책은 외교정책에 비해 다르게 평가되어야 한다.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조선왕조의 어느 군주보다도 탁월했다고 여겨지지만 다른 한편 후기의 경제정책, 특히 궁궐영건은 악화되고 있는 당시의 경제환경 하에서 백성을 도탄에 빠뜨려 광해군 폐위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여겨진다. 즉, 외교 정책의 탁월성만큼이나 경제정책의 실패 또한 컸다는 것이다. 다만 당시의 국민총생산, 은의 가치와 은의 유출로 인한 경기침체, 궁궐영건 비용의 크기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필자의 주장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광해군에 대한 필자의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인조반정이 명실상부한 반정이 아니라는 이덕일의 견해에는 동의한다. 이유나 원인이 무엇이든 인간의 행위에 대한 평가는 나타난 결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정 세력은 집권 이후 결코 개혁다운 개혁 프로그램을 실천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정 세력은 논공행상 과정에서 분열하여 병자호란의 빌미를 제공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 점에서 필자는 인조반정을 명실상부한 반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광해군도 재위 후기에 쿠데타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폐위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결론적으로 폐위의 책임은 광해군 자신에게 있지만 인조반정도 명실상부한 반정이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두 군주에 걸친 백성들의 불행이라고 하겠다.

→출처 : http://emerge.joins.com/200102/200102_202.asp

②명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다. 선왕이 즉위하여 40년 동안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평생 등을 서쪽으로 대고 앉은 적이 없었다. 광해군은 배은 망덕하여 천명의 두려움을 모르고, 음흉하게 두 마음을 품어 오랑캐에게 정성을 바쳐 기미년 오랑캐를 칠 싸움에 이르러 장수에게 “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일렀다. 우리 삼한 예의의 나라로 하여금 오랑캐와 짐승의 지경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통탄해 본들 어찌 말을 다하겠는가? [ 광해군 일기 ]

조선 시대에 시호 없이 호칭되는 ‘∼군’은 부도덕하면서 무능하여 국가와 민생에 커다란해를 끼친 폭군에게 붙여진다. 이 같은 군주로는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이 있었는데 노산군은 약 250년 후 숙종 때 단종으로 복위된다. 숙종 전까지의 노산군도 그 칭호만 보면 무언가 큰 잘못을 저지르거나 무도한 왕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 되었듯이 폭정 사실이 두드러진 연산군과는 다소 달랐던 광해군에 대한 평가도 그의 공과에 따라 재평가하는 것이 필요할 듯싶다. 광해군을 폭군으로 몰아낸 이유는 위 자료에서 보이듯 첫째, 임진왜란의 은인인 명의 은혜를 저버렸다는 것과 둘째, 임해군.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유폐하여 인륜을 어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명을 배반했다는 것은 후에 정묘·병자호란을 자초한 정통 성리학자인 서인의 정책과 비교해 볼 때, 떠오르는 후금(후에 청)과 지는 명 사이에서 실리적인 중립 외교를 표방함으로써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리고 둘째의 경우도 후궁 출신의 광해군이 뒤늦게 적자로 태어난 영창 대군의 지지 세력에 의해 그의 자리가 위협을 받는 속에서 저지른 경우이기에 많은 정권 다툼의 하나로 보아야지 그에게만 인륜의 굴레를 씌어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만약 그게 그렇게 큰 문제라면 태종.세조.영조 등도 인륜으로 그 책임을 물어 당연히 시호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간 선조를 대신하여 의병을 독려하고 민심을 수습하면서 크게 활약했고, 전쟁 후에도 사고의 정비, 동의보감 같은 서적 편찬, 성곽 병기 수리, 양전 사업과 호패 실시 등의 정책으로 복구 사업과 민생 안정을 위해 크게 노력한 업적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즉, 인조를 비롯한 서인 세력들이 정권 탈취를 합리화하기 위해 '광해군’으로 깎아 내렸고, 이후 계속해서 서인이 집권하는 바람에 복위될 수 없었던 광해군의 공과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제법 재미있군 외교적인 측면에서 재평가 받아야된다는 사실은

왠만한 사람이면 다알겠지만

경제적 측면은 흠......그렇군 단순히 폐륜적인 것때문에

폐위 된건 아니었군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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